[글로벌 포커스]궁지 몰린 아베, ‘일본인 납북자’ 카드로 또 탈출 시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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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트럼프에 “김정은과 회담때 납치문제 거론” 집착 이유는

2002년 고이즈미와 함께 김정일 만난 아베 2002년 9월 17일 평양을 전격 방문한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찌푸린 표정으로 김정일을 바라보는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왼쪽에서 세 번째)의 모습이 뒤쪽에 보인다. 아사히신문 제공
2002년 고이즈미와 함께 김정일 만난 아베 2002년 9월 17일 평양을 전격 방문한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찌푸린 표정으로 김정일을 바라보는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왼쪽에서 세 번째)의 모습이 뒤쪽에 보인다. 아사히신문 제공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납치 문제도 거론해 달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6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요청했다. 다음 달 중순엔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같은 부탁을 할 계획이다. 2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자체적으로도 복수의 루트를 이용해 북한에 북-일 정상회담 희망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없다”며 대북 압박만 강조하던 아베 정권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빠른 전개에 ‘저팬 패싱’을 우려하며 긴장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일관되게 말해 왔다. 왜 이렇게까지 납치 문제에 집착하는 걸까.

무엇보다 일본 국민의 관심이 뜨겁기 때문이다.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 김현희가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 선생이 일본에서 납치된 여성이었다고 증언하면서 1970, 80년대 실종자들이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는 설이 부상했다. 특히 1977년 11월 니가타(新潟)에서 하굣길에 종적을 감춘 여중생 요코타 메구미(橫田めぐみ·당시 13세) 가족의 딸을 찾는 애타는 호소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런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아베 총리 부부가 지방 사학재단의 국유지 헐값 매입 과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이른바 ‘모리토모(森友) 스캔들’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아베 총리가 납치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종의 돌파구인 셈이다.

현실적으로도 북한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납치 문제에 얽힌 실타래부터 풀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이 추진했던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 교섭이 납치 문제에 걸려 좌초됐을 정도로 납치 문제는 전 국민적 관심사다. 당시 납치 문제 미해결을 내세워 국교 정상화에 반대했던 대표 주자가 아베 관방 부장관이었다. 그 뒤 그는 ‘납치의 아베’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아베 총리로서는 이 문제를 ‘결자해지’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 김정일 위원장, “유감스러운 일…솔직히 사과하고 싶습니다”

2001년 고이즈미 정권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막후교섭을 시작했다. 2001년 10월경 북한 측이 ‘극비리에 만나자’는 제안을 해온 게 시작이었다. 일본은 국교 정상화와 납치 피해자의 귀국을 목표로, 북한은 36년간 식민 지배의 배상을 목표로 본격적인 교섭에 나섰다. 2001년 가을부터 1년간 베이징(北京), 다롄(大連) 등에서 20여 회의 비밀 접촉이 있었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가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하고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평양선언은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하고 식민지 시절 생긴 재산과 청구권을 쌍방이 포기함과 동시에 ‘과거 청산’은 국교 정상화 뒤 경제협력 형태로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북한은 국교 정상화를 전제조건으로 납치 문제와 핵·미사일 문제 등의 포괄적 해결안을 받아들였다. 고이즈미 정권은 내부적으로 100억 달러 규모의 대북 경제 지원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날 오전 평양에 도착한 일본 대표단에 북한 측이 ‘납치 피해자 13명 가운데 8명이 사망했고 5명이 생존해 있다고 전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요코타 메구미도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 아베 관방 부장관이 가장 단호하게 국교 정상화 반대

일본 대표단이 받은 충격은 컸다. 평양선언 조인식을 앞두고 일행끼리 격론이 벌어졌다. 이때 “13명 중 5명만 생존해 있다는 게 무슨 말이냐. 총리는 평양선언에 사인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 것이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기왕 온 것이니 조인식은 하자”며 그를 달랬다. 조인식 현장에서 김정일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솔직히 사과하고 싶다”며 “생존자 5명을 일본에 일시 귀국시켜도 좋다”고 했다. 그간 줄곧 “납치는 날조”라 주장해 온 북한의 첫 자백이자 김정일로서는 평생에 걸친 유일한 사죄였다.

하지만 고이즈미 일행의 귀국 후 일본 내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매스컴은 대대적으로 반(反)김정일 캠페인을 전개했다. 여기에 더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상황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베는 ‘국민 생명을 중시하는 젊은 정치인’ 이미지를 굳혔다. 이 같은 국민적 인기는 2006년 그가 ‘전후(戰後) 최연소 총리’ 자리에 오르는 데 큰 힘이 됐다.

이후 북한은 약속대로 5명의 생존자를 일시 귀국시켰으나 일본 정부가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양국 간 교섭은 난항에 빠졌다. 2004년 5월 고이즈미 총리는 두 번째로 방북해 귀국 피해자들의 가족들을 데려왔다. 이후로도 북-일 간 교섭은 간헐적으로 이어져 2014년 ‘스톡홀름 합의’(일본인 납북자 문제 재조사와 일본의 대북 독자제재 완화)에 이르기도 했으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해 아베 정권이 강경 자세를 취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 북핵 미사일 해결에 일본의 경제 지원 필요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는 지금도 일본 정부의 과제다. 지난해 여름 일본 정가에는 고이즈미 방북 15주년(9월 17일)을 즈음해 아베 총리가 직접 북한을 방문하는 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아베 정권이 견지하던 대북 압박 노선과 방북은 괴리가 너무 심했다. 아베 총리로서는 함께 보조를 맞춰 온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게 전격적으로 김정은과 만나겠다고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9일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만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북-일 평양선언에 기초하여 납치, 핵·미사일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그간 북풍몰이를 하며 대북 제재 일변도의 자세를 보이던 일본 정부가 갑자기 노선을 선회한다고 북한이 이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북한은 납치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이미 다 해결된 사안”이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지원은 북한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게 하는 문제와 일본이 긴밀하게 연동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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