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미리읽는 아침신문 칼럼]초고령 일본 할머니들의 ‘위풍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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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월 28일 20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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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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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

17일 올 상반기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나 혼자서 갑니다’의 저자 와카타케 지사코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지난해 데뷔한 첫 작품으로 만 63세에 일본 신인작가의 최고 등용문을 통과했다. 일본 언론은 ‘100세 인생 시대에 어울리는 신인의 등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전업주부였던 그는 55세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뜬 뒤 아들의 권유로 소설강좌에 다녔다. 소설 주인공도 자식을 다 키우고 남편마저 떠나보낸 뒤 ‘늙음’과 맞닥뜨린 74세 할머니. “사람 마음은 다 같지는 않아”라고 도호쿠 사투리로 중얼거리며 고독을, 늙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지난해 11월말 초판을 내 12만부가 팔렸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를 잡는데 60년 넘게 걸렸다. 뭔가를 시작하는데 늦은 때는 없다는 걸 실감했다”고 회고한다.

초고령화 시대를 헤쳐나가는 일본에서는 노인들이 맹활약 중이다. 거리에서나 TV화면에서나 생기 넘치는 노익장을 접할 수 있다. 전시회 연주회 도서관 등 문화공간에도 노인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구매력이 있다보니 시장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지난해 일본의 연간 베스트셀러 1위는 95세 여성작가 사토 아이코가 쓴 ‘90살, 뭐가 경사라고’가 차지했다. 필자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일상에서 발견하는 자신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유쾌하게 지적해 박수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판매 100만부 넘었다는 소식에 그녀는 “대체 왜?”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100세 전후 할머니들의 저서가 일본식 영어로 ‘아라한(around hundred) 책’이라 불리며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표지나 책날개에 저자의 연령을 눈에 띄게 표시한 게 특징. ‘100세 정신과의사가 발견한 마음 조절법’(다카하시 사치에)은 근 70년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삶의 힌트’들을 조언한다. 지금도 현역 화가로 활동하는 시노다 도코(105)의 ‘103세가 돼 알게 된 것’은 2015년 출간된 후 50만부 넘게 팔렸다. 같은 해 일본 최초의 여성보도사진가인 사사모토 쓰네코(104)의 ‘호기심 걸(girl), 지금 101세’도 인기를 모았다.

일본 출판계에서 ‘할머니 책’이 금맥임을 깨달은 계기는 2012년 와타나베 가즈코 수녀(당시 85세)의 에세이집 ‘주어진 자리에서 꽃 피우세요’가 200만부 넘게 팔리면서다. 그에 앞서 2009년 시바타 도요(당시 98세)가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자비 출간하자 150만 부 이상 팔렸다.

독자는 ‘롤 모델’을 찾는 60~80대 여성이 압도적이다. 이들은 ‘아라한 책’에서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선배들의 진취적인 자세를 배운다. 출판사들은 ‘아직도 배고픈’ 독자들의 수요를 충족하고자 노인 저자를 찾아 헤매고 있다. 출판 담당자들은 “80세도 저자로선 아직 젊고, 70대는 너무 젊다”고 말한다.

이들 ‘위풍당당’ 할머니 작가들의 이구동성은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는 것. 그러나 책을 쓴다는 것은 심신 모두의 건강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100세가 넘어서도 세상을 향해 발신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일본 노인 대부분은 전철의 우선석에 앉지 않는다. 스포츠 센터는 땀을 흘리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로 치닫고 있다. 준비되지 못한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의 노인들도 좀더 분발하고, 동시에 이들의 노력을 사회 전체가 응원하는 여유가 생기길 빈다. 노인들의 오늘 모습은 다음 세대의 미래 모습이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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