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완준]왜 ‘싱가포르 김정은’을 베이징에선 볼 수 없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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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11일(현지 시간) 오후 9시 50분경.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스카이타워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로비. 수십 명의 관광객이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곧 등장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원들과 함께 등장한 인물은 인민복 차림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앞머리를 빳빳이 뒤로 넘긴 평소와 달리, 앞머리가 약간 앞으로 흘러내려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김 위원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뒤에도 관광객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오후 10시 20분경 김 위원장이 내려오자 다시 촬영 세례가 시작됐다. 김 위원장이 미소 띤 얼굴을 돌려 관광객들을 쳐다본 뒤 손을 흔들었다. 전망대에 오기 전 마리나베이샌즈 식물원을 찾아서는 싱가포르 장관들과 셀카도 찍었다.

김 위원장이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잠시나마 모습을 드러내 손을 흔드는 방식으로 ‘소통’한 것도, 이들의 스마트폰에 김 위원장의 모습이 담긴 것도, 김 위원장의 셀카가 거의 실시간으로 트위터 등에 공개된 것도 모두 처음 일어난 일이다. 김 위원장이 10일 싱가포르에 도착해 12일 밤 싱가포르를 떠날 때까지 김 위원장의 대부분 일정은 실시간으로, 또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공개됐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싱가포르를 방문한 인물이 김 위원장이라는 걸 세계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정상국가의 정상들에겐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최근 두 차례 중국 방문을 현장에서 취재한 기자에게 이는 놀라운 ‘개방성’으로 다가왔다. 방중 때를 생각하면 일반 관광객들에게까지 여과 없이 노출된 김 위원장의 야경 투어는, 그의 표현대로 ‘공상과학’ 같은 느낌까지 줬다. 김 위원장의 2차례 방중 공통점은 과도한 비밀주의로 가득 찬 ‘폐쇄성’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3월 첫 방중 때 그가 도착한 베이징역은 물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인민대회당과 하룻밤을 머문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 등의 인근 도로 수백 미터가 통제됐다. 중국과 북한 어느 쪽에서도 김 위원장의 방중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날 중국의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분명하다. 김정은의 얼굴을 직접 봤다는 베이징 시민이 아무도 없다는 게 아이로니컬하다”고 말했다. 두 차례 방중 모두 중국은 김 위원장이 북한에 돌아간 뒤에야 공식 보도를 시작했다.

김 위원장이 정말 핵 포기를 통해 북한의 경제 번영을 이룰 뜻이 있다면 그의 발걸음은 머지않아 워싱턴을 향하게 될 것이다. 비핵화가 진전된다면 그의 보폭은 지금껏 가보지 못한 더 많은 나라들로 향해야 할 것이다. 그럴수록 더 많이 노출되고 공개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멀쩡히 방문해 있는 김 위원장의 방중 사실마저 밝히지 않는 ‘과도한 비밀주의’의 이유로 ‘신변 안전에 대한 북한의 요구’를 든다. 하지만 싱가포르 방문만으로도 그 이유가 성립되지 않음을 전 세계가 확인했다. 어느 때고 다시 중국을 방문한 김 위원장의 일정이 여느 정상들처럼 공개되고, 김 위원장이 중국의 일반 시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웃으며 손 흔드는 날이 올까. 그때서야 “북-중 관계가 정상국가 간 관계”라는 중국 당국의 말을 믿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
#김정은#비밀주의#북중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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