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보 “중국, 자유 표현할 수 있는 땅이 되길”… 中민주화운동 불씨 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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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한길’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타계

1989년 톈안먼 시위현장의 류샤오보 류샤오보가 1989년 6월 2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지식인들을 대표해 단식투쟁을 벌이던 모습. 왼쪽부터 당시 민주화 시위를 이끈 주역들인 저우둬, 류샤오보, 허우더젠, 가오신. 
류샤오보는 나흘 뒤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체포됐다.
1989년 톈안먼 시위현장의 류샤오보 류샤오보가 1989년 6월 2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지식인들을 대표해 단식투쟁을 벌이던 모습. 왼쪽부터 당시 민주화 시위를 이끈 주역들인 저우둬, 류샤오보, 허우더젠, 가오신. 류샤오보는 나흘 뒤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체포됐다.
정치적 자유가 억압된 중국 사회에서 일평생 자유를 갈망했던 중국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 류샤오보(劉曉波)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해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13일 오후 6시 40분경 중국의 감시 아래 숨을 거뒀다. 향년 62세.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류샤오보 사망이 중국 내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될지 주목된다.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5월 간암 말기가 돼서야 선양(瀋陽)의 중국의대 제1병원으로 뒤늦게 옮겨졌다. 병원은 지난달 26일에야 이런 사실을 공개했다. 류샤오보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은 미국 독일 의사 2명이 9일 가능한 한 빨리 독일이나 미국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고 미국과 독일 정부가 출국 허용을 요구했음에도 병원 측이 해외 치료 불가 방침으로 시간을 끌다가 17일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병원 측은 12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려 “병세가 극도로 악화돼 사경에 이르렀다”며 “병원은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생명 유지를 위해 기관에 튜브를 삽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가족들이 류샤오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기관 삽입을 거부했다”고 밝혀 사망을 예고했다. 이어 “가족들도 상황을 이해하고 (필요한 조치를 위해) 서명했다”고 올려 가족들이 사실상 류샤오보 사망을 인정했음을 시사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나서야 석방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사례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고인은 2008년 10월 중국 헌법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표현의 자유라는 당연한 주장을 담은 ‘08 헌장’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류샤오보는 2009년 국가전복선동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고 랴오닝(遼寧)성 진저우(錦州)교도소에 수감됐다.

류샤오보의 사망으로 해외 치료를 거부한 중국당국에 대한 국제적 비판 여론도 커지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관련국들이 중국 주권을 존중하고 개인의 사건을 이용해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반박했다.

“나는 우리나라(중국)가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땅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국민의 발언이 모두 동등한 대우를 받고 다른 가치관, 신앙, 정견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국민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정견을 발표하고 절대 박해받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인권운동가이자 중국인 첫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자유의 갈망자’라 불렸다. 그는 2008년 10월 표현의 자유와 공산당 일당독재 종식을 주장한 ‘08 헌장’ 발표 뒤 체포됐다. 2009년 12월 23일 법정에서 한 이 최후 변론이 그가 남긴 마지막 공개 발언이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막는 건 인권을 짓밟고 인성을 질식시키며 진리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변론 직후 그는 11년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건 간암 말기로 죽음을 앞두고서였다. 중국당국이 병세가 위중하다는 이유로 출국을 불허한 배경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11일 “중국당국은 그의 무덤이 반체제 인사들의 성지가 되는 걸 막으려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그를 ‘우리 시대의 만델라’라고 불렀다.

류샤오보도 중국의 일부 다른 인권운동가들처럼 1993, 1998년 등 몇 차례 미국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죄가 없는 내가 왜 떠나야 하느냐”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1955년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나 강단에서 중국 현대문학을 가르쳤다. 촉망받는 작가이자 학자였던 류샤오보는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톈안먼(天安門) 사태 시위에 참여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 방문학자로 체류 중이었지만 톈안먼 사태가 터지자 귀국했다.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 때문이었다. 시위대 측 대표로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반혁명선전선동죄’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톈안먼 사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다 공직이 박탈되고 20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으며 1996년에는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다 노동개조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민주화 투쟁의 정점은 2008년 12월 ‘08 헌장’을 기초하고 발표했던 시점이다. ‘08 헌장’은 1977년 자유파 지식인 257명이 체코슬로바키아 구스타프 후사크 정권의 인권 탄압을 고발한 ‘헌장 77’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헌장에는 반체제인사 303명이 서명했지만 류샤오보만이 체포됐다. 샤예량(夏業良) 전 베이징대 교수는 류샤오보가 체포 후 헌장을 혼자 만들었다며 책임을 떠안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08 헌장’의 발표 취지에 대해 “중국 공산당이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관료 부패가 날로 악화되고 법치의 실현은 점점 요원해졌으며 인권은 실종되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핵심 아이콘으로 부상한 그는 2010년 10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으나 자신은 물론 아내와 가족, 친구 누구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진행된 시상식은 빈 의자에 류샤오보의 사진을 올려놓고 진행됐다. 다른 사람이 대독한 수상 소감에서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초이자 인간 본성의 바탕이고 진리의 어머니”라는 명문은 2009년 그가 최후 변론에서 한 말이다.

아내 류샤와 단란했던 한때 13일 타계한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왼쪽)가 환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부인 류샤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사진 출처 BBC 중문판
아내 류샤와 단란했던 한때 13일 타계한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왼쪽)가 환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부인 류샤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사진 출처 BBC 중문판
그는 생전 옥중결혼한 아내 류샤(劉霞·56)에 대한 순애보를 담은 많은 시를 발표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사랑하는 이여/독재자의 감옥에서는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자유의 그날까지 투쟁하겠습니다/당신의 죄수가 된다면 시간의 구속 없이 나는 영원히 당신의 감옥에 갇히겠습니다.”(‘나는 당신의 영원한 죄인’)

고인이 죽음을 앞두고 해외 치료를 받으려 했던 것도 사망 뒤 혼자 남겨질 류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고인의 투병 소식이 알려진 올해 7월 1일 홍콩 반환 20주년을 즈음해 홍콩 민주화 운동 세력은 홍콩의 자치 강화와 함께 류샤오보의 석방을 주요 주제로 내걸었다. 류샤오보의 죽음이 홍콩과 대만은 물론 대륙에서도 민주화 운동에 새로운 불씨가 될지 주목된다.

고인은 2009년 12월 최후 변론에서 “내가 중국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필화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이기를 기대한다. 이제부터 (정권의 생각과) 다른 말과 글이 유죄가 절대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중국에서 아직 표현의 자유는 꽃피지 못했다.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 구자룡 기자
#중국#시진핑#인권운동#노벨평화상#류샤오보#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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