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법원, ‘항일 영웅담’에 의문 제기한 사학자 유죄 선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9일 21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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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다섯 명의 팔로군 병사가 중국 허베이(河北)성 랑야산(狼牙山)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수세에 몰리자 항복하지 않고 절벽으로 투신해 그중 세 명이 죽었다는 ‘랑야산 다섯 병사’ 이야기는 중국 항일전쟁사의 유명한 영웅담이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 영웅담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한 중국 사학자에 대해 중국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28일 미국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北京) 시청(西城)구 법원은 전날 훙전콰이(洪振快) 전 ‘염황춘추’ 편집장에게 량야산 다섯 병사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사흘 안에 사과문을 게재하라고 판결했다. 2012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권력을 잡은 이후 중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는 가운데 내려진 판결이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랑야산 다섯 용사 이야기에 나타나는 정신은 현대 중국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훙 씨의 의혹 제기는 “중국의 정신적 가치를 손상시켰다”고 지적했다. ‘근거 없는 의심’으로 유가족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더 나아가 대중의 국가 정체성에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이에 훙 씨는 “항일 영웅들을 존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사실도 존중받아야 한다”며 즉각 항소하기로 했다. 훙 씨의 변호사도 “이 재판은 명백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치 재판”이라고 말했다. 훙 씨는 2013년 ‘염황춘추’ 기고에서 다섯 명의 ‘영웅’들이 실제로 일본군들을 죽였는지 여부와 산에서 자발적으로 뛰어내렸는지 여부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현재 중국에서 진행 중인 ‘정치 재판’은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천안문 사태 희생자의 묘역을 매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작년 3월 구금된 인권운동가 첸윤페이(陳雲飛) 씨는 쓰촨(四川)성 청두(城都)에서 소란 유발 혐의로 30일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44000명의 트위터 팔로어를 거느린 첸 씨가 그 영향력을 이용해 중국의 정치 제도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해외에까지 유해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첸 씨의 변호사는 “제 아무리 확고한 증거를 가져오고 달변으로 변호한다 해도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며 이번 재판은 정치재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재판은 시 주석이 권력을 잡은 후 중국 내에서 벌이고 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유례없는 탄압”의 한 단면이라는 분석이다. 2014년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 인권변호사 텅비아오(¤V) 씨는 지난달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은 사람을 구금하는 데 기준을 낮추고 인권에 대해선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인권운동가로 잘 알려진 미국 뉴욕대 법대 제롬 코헨 교수도 “중국 내 사상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 오는 중국 석학의 수가 최근 눈에 보이게 증가했다”며 “이 흐름은 마치 1940년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오던 학자들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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