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이 배반자로, 다시 동반자로?’ 호치민에서 떠올린 北-베트남 굴곡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5일 11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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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기자의 베트남 르포

#장면1

설 연휴를 맞아 찾은 호치민시. 2월의 뜨거운 햇볕에 달아오른 시내 도로 옆에 낮 익은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 공산당기를 바탕으로 노동계급을 상징하는 노동자가 있고, 그 뒤로 농민, 군인, 체육인, 지식인을 상징하는 사람들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북한 노동당이 가장 많이 쓰는 선전화와 구도가 판박이었다. 밑에 적힌 베트남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북한이라면 저 밑에 “당의 기치 따라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가 적혀 있을 것이다. 선전화를 보는 순간 “베트남이 공산당 국가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강력한 붉은색을 바탕으로 그려진 선전화는 시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 전 주석이 선전화 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고, 선전화의 대다수가 계급적 화합과 충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밑에 적힌 베트남어만 아니라면 북한 선전화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호치민 전쟁기념관과 거리
호치민 전쟁기념관과 거리
#장면2


베트남에서 규모가 제일 큰 ‘호치민전쟁기념관’에서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에 있는 ‘신천박물관’을 떠올렸다. 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미군 전투기와 탱크를 볼 때만 해도 승전국 전쟁 기념관이기에 북베트남군이 승리한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념관에는 전쟁으로 인한 끔찍한 참상들만이 전시돼 있었다. 학살의 기록을 담은 사진과 전시물들을 보면서 ‘신천박물관’을 떠올렸다. 기념관 측은 전시 의도에 대해 “미군을 고발하기 위해 전시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철저히 미군의 잔혹성에 치를 떨도록 기획한 신천박물관과 다른 점이었다. 북한도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 뒤 신천박물관에 “증오가 아닌 기억을 위한 것”라는 설명문을 새로 붙이게 될지 모른다.

#장면3

관광지 해변에서 택시 기사는 노선이 표시된 구글맵을 꺼내 보여주는데도 태연히 방향과 반대로 차를 몰고 갔다. 영어로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척이다. “스톱”이라고 외치자 ‘그럼 차를 돌릴까’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머리를 끄덕이자 왔던 길로 돌아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갔다. 이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외국 기업들이 들어가는 족족 사기를 당해 결국 짐을 싸고 나오는 북한을 떠올렸다. 외국기업에 대한 북한의 호의는 차에 오를 때까지다. 전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사회주의라는, 중국과 베트남도 이루지 못한 일을 북한은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

北에게 베트남은 ‘혈맹의 국가→배신의 국가배워야 할 국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이달 27, 28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된다. 회담지로 낙점된 베트남은 미국과 북한에 있어 서로 다른 시각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국가다. 북한의 시각에서 베트남은 ‘혈맹의 국가’에서 ‘배신의 국가’로, 다시 ‘따라 배워야 할 국가’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게 베트남은 ‘패전당한 국가’에서 ‘친구의 국가’로 바뀌었고, 이제는 ‘북한의 표본이 될 국가’로 다가섰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50여 년 전 베트남 상공에서 미군과 북한군은 생명을 내건 전투를 벌였다. 당시 북한이 베트남 전쟁을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수백 명의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펼쳐진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혈맹이었던 북한과 베트남의 ‘애증의 역사’를 갖게 된 이유는 뭘까.

“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
지난해 9월 베트남 참전공군부대 열병식
지난해 9월 베트남 참전공군부대 열병식
지난해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뜻밖의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전 참전 공군 종대가 사상 처음으로 등장해 김일성광장을 행진한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TV는 “비엣남(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수적·기술적 우세를 자랑하던 적의 공중 비적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내어 조선인민군의 본때를 남김없이 보여준 공군 종대가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베트남 참전 사실을 숨기던 북한이 외부에 이를 당당히 공개한 것이다.

북한은 베트남전 초기 무기 10만정, 군복 100만 벌 등 물자를 지원했다. 이후 전쟁이 본격화하자 1966년 말부터 공군과 공병부대를 ‘지원군’이란 이름으로 파병해 북베트남군을 지원했다. 공군력에서 열세에 몰린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에 먼저 조종사 파견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북한만 1개 비행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조종사 60명, 정비사 50명 이상을 보냈다. 조종사들이 수시로 순환근무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트남전 기간 연인원 약 1000명가량의 북한 공군 병력이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파병된 북한 조종사들은 황해도 황주 주둔 203비행연대 소속이었다. 베트남 공군복장으로 참전한 북한 조종사들은 하노이 주변 비행장에 주둔했다. 당시 김일성 수상은 “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공중전은 주로 하노이 상공과 인근 항구도시 하이퐁 해상에서 벌어졌다. 북한 공군은 시속 1000㎞ 미그 17기로 시속 2000㎞가 넘는 미국 최신예 전폭기 F-105를 상대했다. 1967년 5월 28일 북한 미그 17기 8대가 하노이 상공에서 미군 전투기 32대와 싸워 12대를 격추했는데 북한군 피해는 전무했다. ‘하노이 공중전’으로 알려진 그 전투였다.

1983년 귀순한 북한군 조종사 이웅평 상위는 “베트남전에서 북한군 조종사 67명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공중전이 주로 해상에서 진행된 까닭에 대다수 전사자들은 베트남 해상에 떨어져 산화했다. 림장안 부연대장을 포함해 시신이 있는 전사자 14명은 하노이 북부 박장성에 묻혔다.

북한은 또 공병부대를 파견해 북베트남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들어갈 갱도를 건설했고, 약 100명의 심리전 부대도 파견해 한국군 전투지역에서 활약했다.
베트남 참전 북한군 조종사들
베트남 참전 북한군 조종사들

‘혈맹에서 배반자로, 다시 동반자로?’

피로 맺어진 북한과 베트남 관계는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식어갔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인근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북한은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양국은 평양과 하노이에서 각각 대사관을 철수했다. 김일성은 베트남군에 의해 쫓겨난 노로돔 시하누크 캄보디아 국왕을 평양으로 데려와 1991년 귀국할 때까지 돌봤다. 19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에도 북한은 중국 편에 섰다.

북한과 베트남은 1984년 외교관계를 복원했지만, 이후에도 가까워질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1986년 베트남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도이모이’ 개혁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1992년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하고 이어 1995년 미국과 수교한 것도 북한의 시각에선 배신이었다.

1999년 탈북한 홍순경 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는 “북한과 베트남 사이엔 별로 왕래도 없었다”며 “북한으로선 베트남에 섭섭한 것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2004년 베트남이 자국에 입국한 탈북자 468명을 한국으로 한꺼번에 보냈을 때도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다.

양국 관계는 2007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해 베트남에서 호치민 주석 이후 처음으로 농 득 마잉 총비서가 북한을 찾았고, 양국 우호관계를 발전시키자는데 합의했다. 베트남을 통한 탈북자들의 한국행 루트도 막혔다.

현재 베트남은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이루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성공함으로써 북한이 배우고 싶은 ‘롤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베트남 국빈방문 일정을 소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정은 시대 북한과 베트남이 과거의 ‘혈맹과 배반’의 역사를 넘어 ‘동반자’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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