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떠나고 보자” 이란에 부는 ‘탈 이란’ 바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9일 15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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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고학력자 실업률 42%에 달해
일자리, 자녀교육 위해 이웃나라 터키로 이민 행렬

‘터키에 집을 사는 방법’

페르시아어(이란 공용어)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이 같은 검색어를 넣으면 수십 개의 페이지가 나타난다. 터키에서 부동산을 사거나 거주 비자를 손쉽게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주겠다는 광고들이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아예 해외로 ‘탈출’을 결심하는 이란 젊은층이 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란에서 나고 자란 다루시 모자파리 씨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부모의 만류를 무릅쓰고 터키 이민을 준비 중이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10년 가까이 저축한 돈을 밑천삼아 터키에서 새 삶을 꾸릴 생각이다. 지난달 시작된 미국의 대(對)이란 1차 경제제재가 그의 계획을 앞당겼다. 그는 “며칠 사이 저축한 돈의 가치가 절반 가까이 떨어진 것 같다. 더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전 터키로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11월 5일이면 이란 원유, 에너지 사업 관련 거래 제재가 담긴 미국의 2차 경제 제재가 시작된다.

이란 경제의 허리가 돼야 할 젊은 세대 사이에서 ‘탈(脫)이란’ 바람이 불고 있다. 대부분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가 목적지다. 터키의 이스탄불이나 안탈리아, 알라니아 등 주로 해안 도시들이 인기다. 이민 상담사 모센 아카르네자드는 “미국이 핵합의를 탈퇴하면서 이란 내 경제 불안감이 높아지기 시작한 최근 4개월 사이 해외이주 상담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대부분 터키를 제2의 고향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중동 언론들은 이 같은 탈이란 바람이 특히 젊은 세대 고학력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지난 해 이란 내 실업자 수는 약 320만여 명. 이란 노동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중 고학력자 실업률이 42%에 달한다. 대학 교육까지 마친 이들이 이란에서 만족할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없으니 아예 이민을 결심한다는 뜻이다. 이란 의회는 지난달 실업률 급증 및 경제위기 등을 문제 삼아 노동부 장관과 경제부 장관을 차례로 해임했다.

테헤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란-터키 상공회의소의 레자 카미 회장은 “봄부터 이란 사람들이 터키 내에서 매매한 주택이나 아파트 수만 1000여 채에 이른다”라며 “대부분 5만~20만 달러(5600만~2억2000만 원) 사이 가격대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터키 현지에서는 이민자들 상당수가 투자보다는 거주를 목적으로 하고, 부유층보다는 서민층이 많다고 분석하고 있다. 터키 내 부동산을 구입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거주 허가를 받기 쉬운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 이민 관련 회사 ASAM은 “6개월 사이 터키로 이민 온 이란 사람들이 (예년에 비해) 약 25% 정도 증가했다”고 밝혔다.

터키 역시 최근 미국과 외교 마찰로 경제 위기에 처했기는 마찬가지다.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올해 들어 40% 가까이 떨어졌고, 지난달 물가상승률(17.9%)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유럽계 은행들로부터 많은 돈을 빌리는 등 기초체력이 가뜩이나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터키 정부에 대한 신뢰도마저 낮아지며 외국 투자 자본이 떠나고 있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심하게는 막대한 외화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터키 경제가 부도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이란 사람들의 터키 이주 러시를 막지는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단순히 일자리나 안정자산에 대한 투자가 이민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주고, 졸업 후 유럽이나 캐나다 등으로 제 2의 이민을 떠날 수 있는 ‘징검다리’로 터키를 활용하겠다는 이란 부모들이 많다.

앙카라 대학 역사학과에 재학 중인 알리 씨 역시 이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의 지원으로 터키로 유학을 왔다. 수년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을 봐온 알리 씨의 부모가 먼저 유학을 제안했다. 그녀는 “이란에는 실업자가 너무 많고 졸업 후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라며 “이란은 교육의 질도 좋지 않고, 종교·정치적 압박도 많다. 반면 터키에서는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BBC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대이란 경제 제재 이후 생활 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약 38만 리알에 팔리던 기저귀 한 묶음 가격이 8월 말에는 85만 리알로 2배 넘게 올랐다. 리알화 가치는 연일 역대 최저치를 경신 중이다. 이란 사람들은 “통장에 있는 돈의 가치는 떨어지는데 사야할 생활필수품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중동 언론들은 11월 미국이 추가 제재를 시작해 이란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되면 이란 젊은층의 ‘탈이란’ 흐름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카이로=서동일특파원 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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