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50주년①] 꿈에서 떠오른 멜로디 ‘창밖의 여자’…조용필 시대 서막 열었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4월 27일 0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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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은 중학교 때 기타를 처음 잡은 후 60여 년간 한 번도 기타를 내려놓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관객의 함성에 전율을 느낄 때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사진제공|YPC프로덕션
조용필은 중학교 때 기타를 처음 잡은 후 60여 년간 한 번도 기타를 내려놓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관객의 함성에 전율을 느낄 때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사진제공|YPC프로덕션
1968년 ‘애트킨즈’로 데뷔…미8군 무대서 활동
1979년 대마초 파문 딛고 ‘창밖의 여자’ 로 재기
1980년대 ‘비련’ ‘단발머리’…오빠부대의 등장
2013년 10년 만의 신곡 ‘바운스’로 젊은층 흡수


‘Lead Me On’!

18살 무명의 밴드 기타리스트는 미8군을 무대 삼았다. 자신의 기타를 여러 대 부순 아버지와 불화로 집을 나온 뒤였다. 먼 타국의 땅에서 복무하던 한 흑인병사가 생일에 고향과 연인을 떠올리며 바비 블랜드의 노래 ‘Lead Me On’을 부탁해왔다. 자리를 비운 밴드 보컬리스트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 병사는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

기타리스트는 가수의 삶을 다짐하며 노래 제목처럼 음악이라는 인생으로 이끌려갔다. 하모니카와 트럼펫, 기타의 선율에 꿈을 꾸며 아버지가 운영하는 염전의 제방 위에서 듣던 비틀스와 레이 찰스와 롤링스톤스처럼 가수의 인생을 그렇게 시작했다.

음악인생 50년. 힘겨워 파란만장했고, 최고의 기량과 실력으로 영광스러웠던 시간. 조용필은 ‘가왕’이라는 국민적 존경과 사랑으로 자신의 삶에 보답했다. 바로 그 삶에 노래와 음악이 있다. 그 가운데 그의 인생에 중요한 변곡점이 된 노래를 다시 듣는다.

●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고 ‘한오백년’

1968년 그룹 애트킨즈를 결성하며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용필은 오랜 시간 무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밤무대를 돌던 그는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며 오버그라운드에 나섰다. 1970년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리메이크한 노래였다. 1973년 한 차례 같은 노래를 담은 음반을 내놓았지만 묻혀갔다. 이를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이 다시 음반으로 발매하자 했다. 그룹 25시에서 함께 활동한 조갑출과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린 축구스타 이회택도 힘을 보탰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재일동포들의 잇단 모국 방문의 대열 속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해 광범위한 대중적 사랑을 확보해갔다. 탁성의 진한 감성으로 부른 노래는 어두웠던 시절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7년 5월 조용필은 은퇴쇼를 열었다. 1960년대 말 잠시 피웠던 대마초 때문이었다. 그해 3월 누군가의 투서로 대마초 흡연 시비에 휘말렸다. 결국 가요계를 떠났고, 이회택과 함께 낚시터로 나돌았다.

그때 ‘한오백년’의 애잔한 선율이 들려왔다. 판소리 공부에 몰입했다. 무대에 나설 수 없었던 때 판소리로 쓰린 가슴을 달랬다.

“판소리에 대한 도전은 그 이전에 조용필의 소리 내공 갖고도 힘에 부쳤다. 따라서 목이 자꾸 가렵고 심지어 토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소금을 먹으며 목의 열을 식혀가며 더욱 정진했”던 그는 “득음의 경지에 도달”했고, “그토록 그리던 탁성과 고음과 중음, 저음의 소리 구성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두루 하나되어 간직할 수 있게 됐”다.(구자형, ‘음악과 자유가 선택한 조용필’)

1979년 10·26 이후 12월 마침내 대마초 파동에서 벗어난 그는 동아방송 드라마 ‘창밖의 여자’의 동명 주제곡을 부르며 다시 대중 앞에 나섰다.


● ‘창밖의 여자’ 그리고 1980년대

밴드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연습벌레였던 조용필은 작사가 배명숙의 노랫말을 들고 “끼니까지 걸러 가며 오선지와 씨름한 지 닷새, 밤을 꼬박 새우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렇게 이어지지 않던 멜로디가 꿈결처럼 귀에 들려왔”고, “미친 듯이 악상을 옮겨 적었다”고 술회했다.(1998년 11월16일 자 경향신문) ‘창밖의 여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노력 끝에 ‘창밖의 여자’는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1980년 9월 TBC ‘제16회 방송가요대상’의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거머쥐었다. 절규하듯 부른 노래는 그해 5월 광주의 아픔과 혼돈스럽고도 우악스런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대중의 가슴을 달래주었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조용필의 시대였다. ‘가수왕’이라 불리던 MBC ‘10대 가수상’의 최고 인기상을 매년 가져간 그는 ‘기도하는…’이라는 소절로 시작하는 ‘비련’ 등으로 ‘오빠부대’라 불린 막강한 팬덤을 형성해갔다. 신시사이저의 신비로운 음색을 더한 ‘단발머리’, 가성의 탁월함으로 듣는 맛을 안겨준 ‘못찾겠다 꾀꼬리’ 등은 그 파격의 형식으로 실험성을 확보하면서도 대중성까지 더하며 훗날 ‘가왕’으로 불릴 면모를 쌓아주었다. 트로트에서부터 록에 이르는 폭넓은 장르 안에서 그는 다양한 세대의 사랑을 받았다. 그 누구도 그가 쌓아올린 아성을 무너트릴 수 없었다.


● 늘 ‘헬로’! 독보적 고유명사 ‘조용필’

“인기, 한마디로 사람 잡는 것이다.”(1991년 6월2일 자 동아일보)

조용필은 그 아성 위에서 이렇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인기에 취해 한때 오만했던 스스로를 질타하는 말이기도 했다. 한 번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사별 등 ‘자연인’으로 겪은 인생의 회한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세월이 쌓이는 동안 그의 음악의 감성과 정서도 더욱 깊고 짙어갔다. ‘친구여’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이 전하는 말’ ‘꿈’ 등은 노랫말의 힘으로써 철학적 가치를 더해주었다.

‘국민가수’의 면모는 그 인기의 탑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성숙함으로 조용필은 대중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파격적이고 신선하지만 그만큼 더욱 친근한 음악으로 다가왔다. 2013년 10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헬로’와 그 수록곡 ‘바운스’는 그래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되었다. 꺼지지 않는 음악적 열정으로 젊은 세대와 오래 묵혔던 자신의 감성으로 교류하며 그는 이제 ‘조용필’이라는 독보적인 음악세계의 고유명사로 불리고 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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