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눈물 젖은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는 아빠들은 ‘무죄’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11월 17일 06시 57분


코멘트
헛헛함과 쓸쓸함 속에서 ‘나이 든 남자’가 먹는 한 그릇의 라면은 결코 ‘우아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라면발을 삼켜내야 한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장면은 그 거룩함을 말해준다. 사진출처|영화 ‘우아한 세계’ 캡처
헛헛함과 쓸쓸함 속에서 ‘나이 든 남자’가 먹는 한 그릇의 라면은 결코 ‘우아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라면발을 삼켜내야 한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장면은 그 거룩함을 말해준다. 사진출처|영화 ‘우아한 세계’ 캡처
영화 ‘우아한 세계’

헛헛한 뱃속을 채우려 끓인 라면 한그릇
참을 수 없는 목멤의 쓸쓸함에 눈물만…
세상이 강요하는 짐은 무겁기만 하구나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중량 100g이 조금 넘도록 단단히 뭉쳐진 고체 덩어리를 펄펄 끓는 물로 풀어내면 고슬고슬하게 익은 면발이 된다. 여기에 흩뿌려 넣은 파 가루 가득한 스프가 녹아내리면 맛깔스럽게 익은 간편식의 대명사로서 라면은 제 기능을 훌륭하게 발휘한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양은냄비 속 라면이라면 더욱 좋다.

면발은 왜 그리도 쫄깃하며 스프의 맛은 또 왜 그토록 유혹적인가. 오죽했으면 작가 이문열도 라면이 한국에 정착한 1960년대 초의 그 맛을 기억하고 있을까. 소설 ‘변경’에서 그는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였다. (중략)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면이 늘 그렇게 ‘귀하고 맛난 음식’으로서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는 건 아닌가보다. 작가 김훈은 “라면을 먹으면서, 낯선 시간들이 삶 속으로 스며들고 절여져서 새로운 늙음으로 늙어지기를 기원”하며 “늙음이 이 부박함 속에서의 낡음이 아니기를, 저 부박함이 마침내 새로움이 아니기를” 바랐다.(2002년 산문집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중 ‘후루룩 목이 멘다’ 라면)

그렇다. 살다보면 안다. 나이 50대 중반에 들어선 때 김훈처럼 라면을 먹으며 목이 메는 순간이 언젠가는 기어이 찾아온다는 것을.

시인 정호승과 황지우가 라면과 눈물을 이야기한 바도 그렇다. 정호승은 ‘슬픈 인생의 어느 한때 / 라면을 혼자 끊여 먹고 / 울지 않는 사람은 거룩’하다면서도 그 자신, ‘가끔 꿈속에서도 / 라면을 혼자 끓여 먹으며 울지’라고 고백하며(시 ‘라면 한 그릇’), 인생을 위해 거룩한 라면 한 그릇을 또 끓여낸다. 그 거룩함을 황지우는 한 사내와 노인에게서 목격했다. 그는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고 부연했다. 시인은 그 덩치 큰 남자처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을 바라보면서 ‘눈물겨운’ ‘거룩한 식사’의 뜨거움을 삼켰다.

이처럼 삼켜내려는 뜨거움 속에서도 기어코 참을 수 없는 목멤의 쓸쓸함은, 곧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만다. 입과 식도를 통해 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할 면발은 쓸쓸함과 눈물에 막혀 며칠 동안 끙끙 앓아야 하는 체증을 부르고 마는데, 그때의 후회란 배고픔을 참지 못했을 때보다 더 아프고 아프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우아한 세계’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아내와 아이들을 저 멀리 떠나보낸 ‘기러기아빠’ 인구(송강호)의 라면은 그래서 마룻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을까. 자신의 곁에서 벗어나서야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에 비춰 추레한 러닝셔츠와 허리끈 늘어진 사각팬티 차림으로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 때문이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라면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리도 차가운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라면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라면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라면은 죄인이 아니다.

그럼 무죄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쓸쓸한 허기를 대충이나마 달래려는 인구의 행위와 인구, 아니 ‘나이든 남자’ 그 자신은 유죄이며 죄인인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밥 벌어 먹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모든 땅 위의 ‘나이든 남자’들이야말로 무죄이다. 온갖 비웃음과 배신적 관계 속에서 꾸역꾸역 자신을 버텨내야 하는 그 모든 ‘나이든 남자’들의 숙명을, 뼈만 앙상해진 두 어깨 위에 천형처럼 올려놓은 세상이 유죄이며 죄인이다. 그럼에도 이 우직한 ‘나이든 남자’들은 세상을 대신해 끊임없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어쩔 도리 없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든 남자’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마음 편히, 아니 그저 쓸쓸하게 비어버린 자신의 헛헛한 뱃속을 채우기 위해 라면 한 그릇 끓여 먹기에도 버거운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환경과 운명 때문에 눈물 흘릴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라면은 그저 처량하기만 하다.

라면발을 씹어 삼키며 그 직후 위장을 덮칠 먹먹한 체증조차 예감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그저 그들의 작은 죄라면 죄일까. 그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환경과 운명을 탓하기에 ‘나이든 남자’들에게 세상이 강요하는 바, 너무도 무겁고 엄중하다. 세상 대신 대가를 치러가는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죄라고 단정한다면 세상은 너무도 비겁하다.

그러니 정호승은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 …’(시 ‘술 한 잔’)며 억울해 했다.

그래도 인생은 그 자체로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정호승도 훗날 그 억울해 했던 것을 후회하며 수많은 나날 속에서 인생이 자신에게 사준 술을 떠올리지 않았는가. 다만 인생으로부터 얻어 마신 뒤 남은 빈 술잔을 채워야 하는 것도 여전히 ‘나이든 남자’들의 몫임에 틀림이 없다. 내팽개친 라면발이 마룻바닥을 더럽혀 놓았음을 눈치 채며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이내 면발을 주워 담아 걸레로 마룻바닥을 닦아낼 수밖에 없는 인구의 궁상맞음도 결국 그 때문이다.

아마도 인구를 비롯한 ‘나이든 남자’들은 그래서 다시 라면을 끓일 것이다. 라면은 그때 또 다시 거룩해진다. ‘눈물로 간을 맞춘 라면을 먹어 보지 않는 사람은 / 인생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며 ‘늘 세상 어딘가엔 눈물로 라면을 삼키는 사람은 있다’(복효근, 시 ‘라면론-라면에 대한 예의’)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오늘, 라면 한 그릇 끓여 먹어야겠다. 눈물은 흘리지 않으리라. ‘팔팔 끓이지 못한 하루가 / 퉁퉁 불어터진 면발 같은 날’이어도, ‘허겁지겁 먹지 않도록 / 나란히 서서 오래도록 젓가락을 들고’ ‘어깨 나란히 하는’(이경숙, 시 ‘겸상’) 사람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인생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가. 헛헛헛!

영화 ‘우아한 세계’

이제는 힘 잃어 후배들에게 치이고 조직으로부터 배신당하지만, 그래도 중년의 가장은 먹고 살아가야 한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없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까. ‘생계형 조폭’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지 모르지만, 어쨌든 40대 가장이면서 조폭 중간보스인 강인구의 일상은 비루하기만 하다. 넓은 거실에서 홀로 라면을 끓여 먹다 유학을 떠난 아이들과 아내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헛헛함으로 이내 라면을 내팽개쳤으면서도 이를 궁상맞게 치우는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의 연기가 더욱 빛난다. 한재림 감독의 2007년작.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