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형 납품땐 일 몇달 몰리는데… 탄력근로 3개월로는 역부족”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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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시간 태풍이 온다]<7> ‘뿌리산업’ 제조업체들의 한숨


서울 구로구 소재 금형업체 A 대표는 근무시간 단축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로 대응하려고 해도 단위 기간이 3개월에 그쳐 이를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일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노사가 합의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늘리는 게 왜 안 되느냐”며 “예상치 못하게 일감이 몰릴 때는 납품을 맞출 수 없으니 일감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 업체는 금형소재와 기계 부품 등을 주로 만든다. 보통 자동차업체에서 신차 개발에 들어가면 공장이 갑자기 바빠지는데, 냉장고나 에어컨 등 가전업체에서도 부품 주문이 들어올 때가 있다. 이 경우 납기를 맞추기 위해 추가 근무가 두세 달씩 이어질 때도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현행 최대 3개월 단위로 적용하면 대응하기 어렵다. A 대표는 “금형은 물론이고 열처리, 주물, 도금 등 관련 업계가 다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며 “일을 더 하고 싶어 하는 직원도 많은데, 일을 못 하게 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호소했다.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중견업체 B전자회사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갤럭시 S시리즈가 나오는 상반기(1∼6월)와 갤럭시 노트 시리즈가 나오는 하반기에 한 번씩 일감이 몰린다. 개발 기간부터 출시 직전까지 정신없는 기간이 4개월 정도 이어진다. 탄력근로제를 3개월 단위로 적용하면 대처하기 힘들다. 회사 관계자는 “한 주에 근무시간이 16시간(68시간→52시간)이나 사라지니 연구직과 제조기술직은 어떤 유연근무제로도 대처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당장 다음 달부터 실시되는데 인원을 채용하려 해도 교육 기간 등을 생각하면 감당이 안 돼 걱정이 태산이다”며 한숨을 쉬었다.


‘제조업 강국’의 뿌리가 되는 중견·중소 제조업체들이 정부의 근로시간 단축 방침에 따라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현행 최대 3개월인 단위기간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고질적인 인력난과 박한 영업이익에 시달리는 중소·중견 제조업체들은 선진국처럼 단위기간을 최대 1년으로 유연하게 늘려 달라고 호소했다.

이달 21∼23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열린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의 최대 화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였다. 중소기업계는 성명서를 통해 정부에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조속히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영세기업이 생산 수요 변동이 불확실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지만 현행 2주(취업규칙)·3개월(노사 합의) 단위로는 활용이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취업규칙으로는 최대 3개월, 노사 합의가 있을 경우 최대 1년까지로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달 중소기업중앙회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은 탄력적 근로시간 단위기간 확대 시 적절한 기간으로 거의 절반(48.2%)이 ‘최대 1년’을 꼽았다. ‘최대 6개월’이 28.4%, ‘현행(최대 3개월) 유지’는 18.4%에 그쳤다.

인력이 많아 근로시간 단축에 그나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대기업과 달리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은 근로시간 단축의 타격을 더 크게 받는다. 중소기업계는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기업별 평균 6.1명의 인원이 부족하고 근로자 임금은 월평균 27만1000원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생산량의 20.3%가 단축 전에 비해 차질을 겪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내 중소제조업체 대부분이 사실상 대기업과 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들 기업의 생산 차질은 대기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 중소제조업체의 41.9%는 다른 기업의 주문을 받아 생산·납품하는 기업이고, 이들 기업의 매출액 중 원청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81.4%에 이른다. 이들 업체의 31.4%는 위탁기업과의 거래 때 애로사항으로 ‘납기가 촉박함’을 꼽고 있다.

업무 조정을 통해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하고 나선 곳도 있지만 여전히 애로사항이 적지 않다. 난방기기를 만드는 중견업체 C사는 가을·겨울이 성수기라 직원들이 여름에는 성수기 업무량의 70% 정도만 소화한다. 하지만 올해는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고려해 미리 제품을 만들기로 하고 벌써부터 약 90%의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다. C사 관계자는 “성수기에 집중 생산하면 재고가 생길 일이 적고 수요에 맞춰 생산할 수 있지만 미리 제품을 만들어 두려면 재고를 관리해야 하고 성수기 때 탄력적인 대응이 힘들다”며 “현 근무 방식대로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주52시간제#탄력근로#제조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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