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투자보다 단기이익 급급… 해외투기자본 목소리 커질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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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논란]발등에 불 떨어진 기업들


최근 열린 국내의 한 대기업 수뇌부 회의에선 하반기(7∼12월) 본격화할 ‘국민연금의 경영권 개입’에 대한 대책이 심도 있게 논의됐다.

국민연금이 한진그룹에 공개서한을 보내 전에 없던 주주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에 크게 당황했기 때문이다. 이 기업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국민 정서와 여론을 앞세워 기업들을 압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라며 “한진을 시작으로 이른바 ‘개혁’이 필요한 회사들에 대한 압박 카드로 국민연금이 활용되지 않을지 걱정이 크다”고 했다.

이날 회의에선 국민연금의 주주 권한 행사가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이 기업의 또 다른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최근 국내 주요 기업의 지분 점유율을 계속 끌어올려 왔는데, 대기업 IR팀 사이에선 이제 국민연금이 기업의 우호 지분은커녕 경영권을 견제할 수도 있는 지분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앞두고 경영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기관투자가들의 주주권 행사 확대가 경영을 개선하고 기업 가치를 끌어올린다는 시각도 있다.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일본에선 투자자와 경영자 간 대화가 증가하며 주주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의사 결정이 사전에 조율되는 긍정적 측면도 많았다.

그러나 주주권 행사에 힘을 실어주는 움직임이 기업의 약점을 이용해 최대주주를 공격한 뒤 단기 차익을 취하는 외국 투기자본과 행동주의펀드의 입김을 강하게 해줄 것이라는 우려도 강하다. 실제로 올해 4월 초 현대자동차그룹이 정부와의 교감 아래 추진해온 지배구조 개편안은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의 반대로 좌절됐다. 엘리엇은 현대차그룹 개편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다른 주주들에게도 반대를 권고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라스루이스도 개편안 반대를 권고하자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도 이에 편승했다. 국민연금은 끝까지 명확한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고, 결국 현대차그룹은 개편안 의결을 포기했다. 재계에선 “해외 기관투자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실상의 의결권 담합이 이뤄졌고, 현대차그룹과 정부의 개혁 방안이 발목을 잡힌 것”이란 말이 나왔다.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 무산 사례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당초 의도와 달리 장기 비전 투자보다 단기 이익을 올리려는 쪽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는 재계의 우려를 키웠다. 김춘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기업법제팀장은 “아무리 장기 투자를 지향하는 기관투자가라도 운용 담당자는 단기 실적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엘리엇 같은 헤지펀드들이 단기 이익을 추구할 때 이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투기자본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배당 성향이 높아지는 것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예상되는 변화다. 2010년 영국이 코드 도입 전 배당 성향이 59.1%였던 것이 지난해 4월 말 기준 111.1%로 52%포인트 올랐다. 배당 수익률도 3.4%에서 3.9%로 0.5%포인트 높아졌다. 장기적 관점으로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보다는 단기 이익을 취하는 쪽으로 손을 들어줄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재계에선 국민연금의 재정이 취약하다는 점 때문에 연금을 개혁하기보다 배당을 높이는 쪽으로 의사 결정을 할 것이란 의심의 눈초리도 적지 않다.

이에 더해 소액 주주의 권익 증대를 목적으로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이 올 하반기에 통과될 경우 경영권을 흔드는 해외 투기 세력의 목소리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제도팀장은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선출제 등을 통해 외국 투기자본, 행동주의펀드가 한국 기업의 경영에 깊숙이 침투하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설령 기업의 지배주주 투명화나 경제민주화 등 명분을 위해 제도를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경영권 방어’ 대책은 세워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유 팀장은 “차등의결권을 합법화해 기업의 설립자나 오너가 기업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정치권과 정부의 사고 전환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용석 yong@donga.com·김지현 기자
#국민연금#스튜어드십 코드#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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