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유통업계 새해부터 워라밸 바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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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중심으로 확산

#1.
신세계그룹에서 일하는 이모 씨(40)는 요즘 저녁 약속 시간을 잡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오후 5시면 컴퓨터가 저절로 꺼져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래처 직원과의 저녁 약속 시간은 보통 오후 7시. 이 씨는 “2시간가량 근처를 배회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말했다.

#2. 이마트 본사에서 근무하는 김모 씨(37)는 이달 2일부터 시행 중인 ‘주 35시간 근무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는 올해부터 오후 6시에 시작하는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오후 5시에 퇴근하려고 그는 휴게실에서 동료들과 잡담하는 시간을 확 줄였다. 김 씨는 “낮에 집중적으로 일하고 일찍 퇴근해 저녁시간엔 자기계발을 할 수 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많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야근을 막기 위해 사무실을 강제로 소등하는 곳이 많고 원칙처럼 여겨지던 ‘주 40시간 근무’의 벽도 깨지고 있다.

올해 가장 극적인 시도를 한 곳은 신세계그룹이다. 신세계는 2일부터 퇴근을 1시간 앞당긴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시행 중이다. 롯데마트는 출근 시간을 오전 8시부터 오전 10시까지 30분 단위로 쪼개 선택할 수 있는 시차출근제를 운영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2시간 단위 휴가제’를 도입했다. 2시간 휴가를 사용하면 매장 직원들은 오후 5시 30분에, 본사 직원들은 오후 4시에 퇴근할 수 있다.

여러 기업 가운데 유통업체들이 앞다퉈 ‘워라밸’ 정책을 들고나온 건 근로환경 개선을 내건 정부 정책에 발맞추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대형마트에 적용 중인 의무휴업을 복합쇼핑몰에도 적용하는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대규모점포로 등록되면 지역상권 발전 기여금을 내야 하는 내용도 담겨 있어 유통업계의 부담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유통업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워라밸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회사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야 생산성에 보탬이 된다”며 “규제 권한을 가진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퇴근 부담이 줄어들자 직원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에 만족하는 직원도 많지만 일부 직원은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퇴근이 빨라지는 대신에 총 근무시간이 줄어들어 결국 임금이 하락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근로환경 개선 측면도 있겠지만 속내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비용 증가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워라밸’로 이마트 영업시간이 기존보다 한 시간 줄어들면서 일부 고객은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다. 30대 맞벌이 직장인 김모 씨(여)는 “저녁에 업무약속 등으로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잦아 밤늦게 장을 보는 일이 많았는데 폐점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주말에 장을 봐야 할 상황”이라며 “일요일에는 한 달에 두 번 문을 닫으니 장보기를 업무처럼 꼼꼼히 계획을 세워서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송충현 balgun@donga.com·강승현 기자
#워라밸#유통업계#대형마트#신세계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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