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경영의 지혜]양극단을 이해하고 품어야 진정한 ‘중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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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기원전 5세기 ‘중용(中庸)’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중용은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이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중용의 참된 뜻은 무엇일까?

중용의 반대말은 ‘극단(極端)’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양주(楊朱)라는 사상가는 ‘세상이 이롭게 된다 할지라도 내 털 하나 뽑아주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위아(爲我)주의자였다. 또 묵자(墨子)는 ‘세상에 이롭다면 내 몸을 산산이 부서뜨려서라도 돕겠다’는 극단적인 겸애(兼愛)주의자였다. 자막(子莫)이라는 사람은 이 두 사상이 매우 극단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중도를 취했다. 반쯤은 나를 위하고, 반쯤은 세상을 위해서 마음을 쓰겠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런 자막의 태도가 극단적인 위아주의나 겸애주의보다는 낫지만, 중용은 아니라고 했다.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항상 고정된 중도를 취하는 것은 중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은 단순한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인 중도, 부자와 빈자의 중간인 중산층, 우월과 열등의 중간인 평범 등은 중용이 아니다. 진정한 중용이 되려면 양극단을 모두 이해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중용은 상황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항상 중간의 같은 지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중용, 즉 시중(時中)을 해야 한다. 사안과 사태에 따라 가장 알맞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결정을, 때로는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는 기회주의자나 무원칙과는 다르다. 기회주의자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고 무원칙은 주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시중은 공평무사함과 뚜렷한 주관을 전제로 한다.

중용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마음을 비우고 사욕을 내려놓되 전체를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인(仁)의 심성과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낼 수 있는 지(智)의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끊임없이 성찰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 muhay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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