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낮춘 위스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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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블루가 2012년 출시한‘골든블루 사피루스’. 이 술의 도수는 36.5도이다.
골든블루가 2012년 출시한‘골든블루 사피루스’. 이 술의 도수는 36.5도이다.
《위스키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는 40도 이상만 위스키로 인증해주고 도수가 낮은 위스키는 위스키로 거래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그 정도로 ‘최고급 술’이라는 자존심이 강한 위스키업계가 한국에서는 자존심을 굽혔다. 요즘 한국에서 잘 팔리는 위스키는 35∼36.5도의 ‘저도주’이기 때문이다. ‘최고급 술’로 불리며 한때 승승장구하던 위스키업체들이 전례 없는 긴 불황에 위스키의 핵심 요소인 ‘도수’와 ‘연산’을 포기하면서까지 시장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업계 1위인 디아지오코리아가 지난해 선보인 저도수 위스키인 ‘W 시그니처 12’. 도수는 35도.
업계 1위인 디아지오코리아가 지난해 선보인 저도수 위스키인 ‘W 시그니처 12’. 도수는 35도.
1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내 위스키 출고량은 2008년 286만1000상자로 최고점을 찍은 후 2012년 213만3000상자, 2016년 167만9000상자로 매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아직 최종 집계 전이지만 지난해 출고량도 158만7000상자 수준으로 전년 대비 감소한 것으로 위스키업계는 보고 있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매출 하락세에 국내 위스키업체들은 전례 없는 ‘특단의 조치’를 내놓고 있다. 판매가를 인하하는가 하면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해 위스키의 생명인 ‘도수’와 ‘연산’을 대폭 줄인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미 2009년 저도주 시장에 뛰어든 골든블루를 시작으로 2014년 롯데주류, 2015년에는 업계 1위인 디아지오코리아와 페르노리카코리아까지 저도주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부 업체들은 스코틀랜드산 저도주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현지에서 원액을 산 뒤 호주 등지로 가져가 위스키 병에 넣는 수고까지 감수하고 있다.

위스키업계의 이 같은 노력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국내 저도주 위스키(40도 미만) 출고량은 2014년 19만6000상자에서 지난해 69만7000상자로 급증했다.

주류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위스키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도주 열풍’이 위스키업계가 처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수와 연산 표기는 위스키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라며 “10년 장기 불황을 앞두고 국내 위스키업체들이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스키 시장 확대를 위해 업체들은 판매 시장도 다변화하고 있다. 고급 술집이나 바에서 판매되던 위스키를 레스토랑이나 브런치 카페 등에도 내놓아 20, 30대 젊은 고객 확보에도 나서고 있다. 주로 병으로 판매되던 위스키에 대한 고객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0mL 소용량이나 ‘잔술’ 등으로 판매한 ‘조니워커 레드’는 지난해 판매량이 전년 대비 57.7% 성장했다. 같은 기간 국내 조니워커 전체 판매량이 6.2%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성과다.


국내 위스키 시장의 불황은 건강과 자기 생활을 중시하는 ‘웰빙(well-being)’이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 문화의 확산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유흥업소에서 회식 폭탄주로 불티나게 팔려왔던 위스키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변화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2016년 도입된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으로 접대문화가 줄어든 것도 위스키 시장을 위축시킨 요인이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회식문화 개선 등 사회 분위기 변화와 낮은 도수의 술을 선호하는 젊은층의 기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위스키 시장에서 불황의 그림자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으면서 고급 술집이 밀집한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위스키업체들의 ‘탈(脫)강남’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페르노리카코리아가 서초동에서 서울역 인근으로 본사를 옮겼고, 다른 업체들도 임대료 등의 이유로 본사 이전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수년째 시장 불황이 이어지고 있어 업계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다”면서 “젊은층과 일반 식당가를 적극 공략해 위스키 소비를 늘려나가는 전략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위스키#도수#술#저도수#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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