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구본무 회장의 ‘소탈한 리더십’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0일 12시 48분


코멘트
재계에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회고할 때 맨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정도(正道) 경영’이다. 1995년 그룹 회장에 오른 고인이 23년간 강직하게 지켜온 경영 이념이다. 인화의 LG에 1등 DNA를 심으려 노력했지만 한번도 정도를 벗어나는 결정을 하는 법은 없었다.

LG는 2003년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배구조 논란에 말려든 적이 없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도 잡음이 없었다. 이렇다 할 총수 일가 스캔들도 없었다. 1947년 창업 1세대인 구인회-허만정 창업주로부터 시작해 57년간 이어진 구 씨와 허 씨 두 집안이 동업 관계를 마무리하고 LG와 GS그룹으로 분리할 때도 잡음이나 분란은 없었다. 고인은 당시 “LG그룹과 GS그룹은 분리되지만 앞으로도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서는 협력 관계를 더욱 두텁게 해 둘 다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임직원들에 여러 차례 당부했다.

고인을 ‘순리를 따르는 인간 중심의 경영자’, ‘인간적 멋과 향기를 지킨 경영자’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어려운 시기에도 사람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인화의 리더십과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영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던 2008년, LG실트론 등 일부 계열사 실적 악화로 임직원 구조조정 얘기가 돌았다. 그러자 고인은 “어려울 때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며 오히려 경영진을 격려했다. 2006년 비용 부담으로 모두가 만류했던 ‘LG아트센터’ 건립도 구 회장이 기업이익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LG복지재단이 2015년 ‘LG의인상’을 제정해 사회적 의인(義人)에게 위로금을 전달해 온 것도 구 회장의 뜻이었다.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는 시민을 찾아 포상하면 의로운 행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기업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고인은 2017년 철원 군부대 사격장 주변에서 유탄을 맞고 숨진 이모 상병 유족에게는 사재를 털어 위로금 1억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2009년 구 회장의 아들 구광모 LG전자 ID(information Display)사업부장(상무) 결혼식 주례를 본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전 KB금융 회장)은 고인을 큰 경영인으로 기억했다. “항상 정도 경영을 강조하신 분이다.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을 읽고 정도에 따라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LG그룹을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고인은 생전 소탈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유명했다.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 뒤편 삼계탕 집이나 LG트윈타워 내 일식당 등 몇몇 단골 음식점에 비서 없이 홀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2003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을 서울 효자동 삼계탕집 ‘토속촌’으로 초청했을 때, 구 회장은 대통령 바로 왼편에 앉아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어 참석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술은 위스키 등 독주를 즐겼다. 비싼 고급 와인은 손님을 대접할 때만 내놓았다. 지인 자녀 결혼식 등 경조사가 있을 때면 수수한 옷차림으로 조용히 다녀가기로 유명했다.

새와 물고기에 밝아 새와 물고기 도감을 만들 정도로 전문가였다. 특히 새를 좋아해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 꼭대기층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했다. 새로 인연을 맺은 조류학자 윤무부 경희대 명예교수는 “구 회장이 토요일에 집무실로 자주 초대해 망원경으로 새를 함께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면 목각 갈매기, 청둥오리 조각상 등 선물을 꼭 사왔다”며 고인을 기렸다.


고인은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2011년 구 회장이 사내 행사에서 직원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LG 파이팅’을 수차례 외쳤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LG그룹 각 계열사 및 해외 현지법인 경영 혁신 사례를 발표하는 이 행사에서 구 회장은 무대에 직접 올라가 악기를 두드리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직원들에게 술잔을 건네며 어깨를 두드렸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회사를 챙기려 했다. 지난해 4월경 첫 번째 뇌 수술을 받은 뒤 경기 광주시 곤지암에 머물 때도 LG그룹 각 계열사 사업 관련 보고를 받았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마지막까지 그룹 경영을 챙기셨다. 사모님이 건강이 걱정돼 휴대전화를 빼앗았을 정도다”라고 전했다.

최근까지는 곤지암리조트 옆 화담숲 수목원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국내 최대의 이끼정원인 ‘이끼원’을 조성하는 등 구 회장이 정성을 쏟았던 수목원은 미완으로 남았다.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