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할 기업에 퇴직자 낙하산… 메스 제때 못드는 산업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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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대개조/ 구조조정의 적들]<1>부실기업과 한 몸이 된 국책은행

산업은행 리스크관리본부장이던 A 씨는 2006년 5월 퇴직한 뒤 대우조선해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은이 A 씨에게 제안한 자리는 전무 직급의 감사실장이었다. 경영진을 견제하고 구조조정을 주도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우조선은 그에게 1년 만기 고문 계약서를 내밀며 “산은 출신의 다른 고문들처럼 조용히 쉬었다 가라”고 압박했다.

기가 찼던 A 씨는 산은에 부당함을 알렸지만 산은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당초 약속받은 자리를 되찾는 데까지 1년이 걸렸다. A 씨는 “은행에서 퇴직자들을 내보내기에 급급할 뿐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사실상 방치했다”고 말했다.

첫 단추부터 틀어진 A 씨와 대우조선은 갈등을 이어갔다. 결국 취업 2년째 되던 때 대우조선은 A 씨를 대기발령내고, 한 달 뒤 해고했다. A 씨가 회사를 떠난 즈음 당시 정권과 친분이 있는 ‘낙하산 인사’들이 줄줄이 고문으로 선임됐다. A 씨는 회사를 상대로 “부당해고를 당했다”며 소송을 냈고, 2011년 10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산은은 A 씨 이후 최근까지 대우조선에 3명의 퇴직자를 부사장급 등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우조선이 지난해까지 수조 원의 손실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산은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16년이 넘도록 천문학적 부실을 떠안은 채 방치됐다 침몰 위기에 놓인 대우조선과 산은의 관계는 한국 경제의 망가진 ‘구조조정 시스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젯밥에만 관심 둔 국책은행

올 하반기 조선 해운 분야를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앞두고 이 작업을 주도할 국책은행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책은행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의 선순환을 이뤄내기는커녕 한계기업들의 병만 키우고, 은행 스스로도 부실화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2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산업은행의 부실채권 규모는 7조3000억 원에 달했다. 전체 여신에서 부실채권이 차지하는 비율도 5.68%로 역대 최고치로 치솟았다. 수출입은행 역시 지난해 말 부실채권 비율이 3.24%로 2010년(0.77%)에 비해 420% 급증했다.

국책은행의 부실채권이 급증한 주원인은 구조조정을 위해 떠맡은 기업들을 제대로 치유하기보다는 자기 조직 유지와 퇴직 인력 재취업에만 몰두한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새누리당 오신환 의원실이 산은에서 받은 자료에서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 상반기(1∼6월)까지 퇴직 후 재취업에 성공한 43명은 전원이 산은의 자회사(출자 포함)나 투자·대출 등 거래 관계가 있는 기업에 취업했다. 이들은 자회사의 경영 개선과 효율적인 구조조정 지원을 명분으로 해당 기업에 취업하지만 이를 실행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2013년 한 워크아웃 대상 대기업의 감사로 취업한 산은 출신 B 씨는 지난 3년 동안 모두 3억 원이 넘는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 기업은 B 씨가 취업한 지 1년 만에 자본금이 모두 잠식되고 주식 거래가 중단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지난해에는 100억 원가량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퇴직 인력을 전문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재취업시키는 것은 해당 기업의 구조조정을 더디게 하고 부실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 ‘낙하산 인사’에 무기력해진 조직

국책은행이 젯밥에만 관심을 두는 사이 구조조정의 칼날은 무뎌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시중은행은 기업이 한계기업(기업이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상태)으로 판명되기 약 1년 2개월 전에 워크아웃에 착수했다. 반면 국책은행은 한계기업으로 판명되고도 평균 1년 3∼4개월이 지나서야 워크아웃에 나섰다. 국책은행의 구조조정 시점이 시중은행에 비해 2년 반가량 늦는다는 의미이다.

국책은행들의 이 같은 ‘판단 미스’로 인해 한계기업에 쏟아붓는 정책금융의 규모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국책은행이 대기업에 지원하는 금액 가운데 한계기업에 제공된 자금은 2009년 1.9%에서 2014년 12.4%까지 높아졌다. 산업 재편과 신성장동력 발굴 등을 위해 써야 할 귀중한 재원이 대출로 연명하는 ‘좀비기업’에 점점 더 많이 흘러들어 가고 있다는 의미다.

정권마다 ‘낙하산 인사’ 등으로 흔들어 대는 것도 국책은행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산은이 금융위원회나 청와대의 눈치를 보느라 구조조정을 주도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청와대 고위직을 지냈던 한 인사는 “국책은행장들이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청와대를 찾아와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각서를 써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김철중 tnf@donga.com·박희창 기자
#구조조정#산업은행#부실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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