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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대강사 13명씩 배출한 대흥사, 文대통령도 머무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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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대강사 13명씩 배출한 대흥사, 文대통령도 머무른 곳

해남=유원모 기자 입력 2018-08-28 17:28수정 2018-08-2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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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서쪽 능선에 보이는 부처님 형상의 와불.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8일 전남 해남군 대흥사. 해탈문을 들어서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편안하게 누운 부처님 품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대흥사를 둘러싼 두륜산의 두륜봉과 가련봉, 노승봉이 비로자나불상의 머리와 손, 발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일까. 대흥사는 조선 후기 대종사(大宗師)와 대강사(大講師)를 13명씩 배출한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

대흥사의 유서 깊은 역사는 사찰 입구부터 만날 수 있다. 50여 기에 이르는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림이 삼나무 숲길 끝과 사찰 입구 사이에 있다. 서산대사(1520~1604)와 연담유일(1720~1799), 초의선사(1786~1866) 등 조선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부도가 가득하다.
해남 대흥사 전경-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서산대사가 대흥사를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이라고 평가하며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하게 했다”며 “이후 조선 최고의 선승과 교학승을 배출한 중심 사찰이 됐고, 유네스코도 이 같은 역사성에 특히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대흥사는 조선 정조 때부터 특히 번창했다. 정조는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적극적인 군주였다. 당시 승려들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서산대사를 기려달라고 청원했다. 정조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대흥사에 친필 편액을 내린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게 했다. 금빛 글씨로 쓰인 표충사 내부에는 독특하게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스님의 영정과 함께 유교식 신주단지가 모셔져 있다.

해남 대흥사- 표충사.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표충사 동쪽에는 선방 스님들이 머무르는 ‘동국선원’이 자리했다. 이 선원의 7번방은 문재인 대통령이 1978년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8개월여 간 머물렀다고 한다. 선원 뒤편엔 두륜산으로 향하는 산책길이 있어 수련과 공부에 안성맞춤이다.

두륜산으로 더 들어가면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이 있다. 초의선사는 차 이론서인 ‘동다송(東茶頌)’을 집필하는 등 조선 후기 차 문화를 이끈 인물. 다산 정약용(1762~1836)나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과 폭넓게 교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해남 대흥사 전통차밭.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대웅보전과 삼층석탑.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초의선사와의 인연으로 추사는 ‘무량수각(無量壽閣)’등 대흥사 곳곳에 현판을 썼다. 무량수각 바로 옆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가 걸려 있다. 수려하면서도 세련된 글씨체를 자랑한 추사는 생전에 “조선의 글씨를 망친 게 이광사”라며 향토적 색채가 짙은 원교의 글씨를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화해라도 한 듯이 두 현판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원교의 글씨는 대흥사 한 가운데에 있는 ‘천불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름처럼 옥석으로 만든 부처상 1000개가 모셔져 있다. 이 중 300여 개의 부처상 바닥에는 ‘일(日)’자가 새겨져 있다. 1817년 경주에서 제작한 이 불상들은 3척의 배로 나눠 대흥사로 옮기던 중 태풍을 만나 한 척의 배가 일본 나가사키로 갔다. 일본에선 “부처가 왔다”며 반겼지만, 현지 승려가 현몽을 꾼 뒤 이듬해 조선에 되돌려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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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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