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돋보기]자비를 방패 삼는 그들… 커지는 백팔번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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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균 은신으로 본 종교시설과 수배자

#1. 2013년 12월. 박태만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이 조계사에 은신했다. 그는 가장 먼저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했다. 또 공식 창구를 통해 종단 측과 소통했다. 종단은 박 수석부위원장이 머무는 건물 아래층에 직원을 상주시켰다. 조계종 직원들은 직접 식사까지 제공하고 경찰과 언론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굳이 민주노총 직원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박 수석부위원장은 이따금 스님들과 식사하고 경내 산책도 했다. 조계종은 적극적으로 노사 중재에 나섰고 내부의 반발 여론도 달랬다.

#2. 2015년 11월. 한상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조계사에 은신했다. 그는 조계종 측과 공식 대면한 18일 전까지 이틀 동안 비공식 창구로 접촉했다. 하지만 2년 전과 달리 한 위원장을 보호하는 종단 직원들은 없다. 식사도 제공되지 않아 민주노총 자체적으로 도시락 배달을 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산책은커녕 은신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서신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은 한 위원장의 중재 요청에 ‘즉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당장 그를 내치지는 않았지만 내부 의견은 부정적이다.

2013년 12월의 조계사와 2015년 11월의 조계사는 달랐다. 두 모습을 비교해 보면 조계종 측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파업하다 들어온 박 수석부위원장과 불법 폭력시위를 하고 도피한 한 위원장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단은 이런 의견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 않고 있다. 종교시설이 사람을 내치는 모양새에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성당이나 사찰 등은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었다. 시대적 상황이 바뀌면서 이에 대한 종교시설의 대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2000년 12월 명동성당 2000년 12월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한국통신 노조가 인력 감축과 민영화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한쪽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국통신 노조의 장기농성 이후 명동성당은 허가 없는 성당 내 집회를 금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00년 12월 명동성당 2000년 12월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한국통신 노조가 인력 감축과 민영화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한쪽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국통신 노조의 장기농성 이후 명동성당은 허가 없는 성당 내 집회를 금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민주투사의 ‘은신처’ 명동성당의 변화

1970, 80년대 군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의 ‘성지’이자 수배자들의 마지막 은신처는 주로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은 군사정권도 강제 진입을 주저할 정도로 성역으로 받아들여졌다. 군부의 억압을 피해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명동성당에 몸을 숨기거나 성당 안에 터를 잡고 장기 농성을 했다.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당시 강 씨가 명동성당에 숨었을 때도 가톨릭계는 “극단적으로 따지면 성당은 죄인들의 모임 장소다. 천사에게는 성당이 필요 없다”며 그를 보듬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 잡은 건 유신체제 선포 2년 후인 1974년경이다. 유신정권이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며 지학순 주교를 구속했고, 이후 천주교가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명동성당은 시국사범을 보듬는 ‘정치, 사회적 공간’이 됐다.

그런 명동성동이 변한 건 15년 전. “그때 명동성당 언덕이 텐트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죠. 성당에서 농성을 한다고 양해를 구한 사람은 10명 중 1명이나 됐을까요? 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2월 명동성당이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 요청을 할 무렵 성당에 근무했던 관계자의 얘기다.

그는 “소외 계층이 아닌 사람들이 찾아와 성당 측에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장소’만 이용하는 건 문제였다”고 말했다. 고액 연봉을 받는 대기업 노조, 댐 건설 찬성 단체와 반대 단체 등 다양한 이익집단이 몰려왔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열면 언론에서 한 번이라도 더 비춰 준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자리가 비좁을 정도여서 성당에 모여든 수배자들끼리 서로 텐트를 ‘대물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떤 이는 성당 관계자에게 “이틀 정도 있겠습니다”라고 해놓고 1주일이 넘도록 철거하지 않았고, 밤에 몰래 들어와 그냥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는 신부나 신도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변화의 결정적 계기는 2000년 한국통신 노조의 농성이었다. 대규모 파업 농성을 벌였던 한국통신 노조는 그해 12월 22일 농성을 풀고 철수했다. 노조원들이 철수한 성당 주변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였다. 명동성당은 다음 날 “앞으로 명동성당 내에서 점거농성과 시위를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교구장이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의지가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강력하게 민주화운동을 후원해 온 김 추기경도 시대적 흐름의 변화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만큼 무분별한 집단행동으로 인해 가톨릭 성지가 더 이상 훼손돼선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는 게 가톨릭계 인사들 얘기다.

당시 백남용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그동안 성당 내 여론을 수렴한 결과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정상적인 신앙활동을 차단하는 집회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면서 “앞으로 정리집회 등 간단한 행사는 허용하겠지만 점거집회나 장기 천막농성 등의 요청이 들어오면 단호히 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0년 정진석 추기경이 “국책 사업인데 무조건 반대보다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로 4대강 사업 반대 여론에 우려를 표명하자 진보와 보수 성향 단체들의 시위로 한때 시끄러운 적도 있었지만 이는 모두 성당 밖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서울대교구 서동경 홍보팀장은 “최근 몇 년 사이 명동성당 내에서 농성이나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다”며 “명동성당이 정치적 또는 집단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교회의 원칙이 사회적 합의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은신처로 자리 잡은 조계사도…


명동성당의 집회 불허 방침 이후 조계사가 수배자들의 새로운 은신처가 됐다. 2013년 말 박태만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이 조계사로 숨어들었을 때 “산사에 찾아온 짐승도 쫓지 않고 먹이를 주는 게 불교 정신”이라며 그를 받아들인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한 위원장의 은신을 바라보는 조계종 내부의 시선은 딴판이다.

17일 조계사를 찾은 신도 유모 씨(42·여)는 “관음전 앞에 카메라가 많아 ‘부처님을 찍는 건가’ 생각했는데 한 위원장을 찍기 위해 온 것이었냐”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조용한 사찰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했는데 이곳도 당분간 시끄러워질 것 같다”며 절을 나섰다.

조계사는 국내 최대 불교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행정부’ 격인 총무원이 있는 핵심 시설이다. 총무원장으로 상징되는 종단 지도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어서 운동권 세력이 선호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와 관련한 수배자들의 장기 은신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은 불교계를 자극했다. 조계사 주변에 배치된 경찰이 수배자 검거를 위해 일일이 차량을 검문하면서 당시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타고 있는 차량 트렁크를 뒤지자 불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공교롭게도 기독교(개신교) 장로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불교계가 정부의 종교 편향을 주장하던 때였다. 결국 당시 어청수 경찰청장이 사과했지만 상황은 마무리되지 않았고, 그해 8월 서울광장에서 정부의 종교 편향을 비판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열렸다. 주최 측 추산 20만 명, 경찰 추산 6만 명의 대규모 행사였다.

하지만 이번 한 위원장 은신을 둘러싸고 조계사 신도는 물론 종단 내부에서도 과거와 달라진 기류가 확연하다. 그만큼 이번 시위 과정에서 나타난 시위대의 폭력성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음을 방증한다. 한 위원장 은신 이후 조계종 내부에서는 자비를 표방하는 불교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내쳐선 안 된다는 정서도 있지만 퇴거를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핍박받는 자의 피난처인가, 범법자 위한 소도(蘇塗)인가


군부독재나 부당한 공권력이 활개 치던 당시 종교시설은 ‘소외된 자’에게 중요한 피난처였다. 종교계가 그들을 보듬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고, 국민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덕분에 종교시설 내 공권력 투입은 금기(禁忌)로 여겨졌다. 2002년 발전노조 조합원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조계사 내부로 진입했다 결국 서울경찰청장이 사과하고, 이후 조계사에 공권력이 투입된 적이 없다.

종교시설 외에도 민주화 이후 대학, 언론사 등은 우리 사회에서 공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영역으로 꼽히고 있다. 자율성이 보장돼야 하는 대학이나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본연의 기능으로 하는 언론사에 공권력을 투입하면 국민적 공감을 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학교 방문에 반대하는 총학생회 학생들을 사복 경찰이 저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말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관련 청와대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에 강제수사 가능성이 나올 때도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요즘 종교계의 고민은 공권력이 아닌 국민의 시선이다. 한 위원장이 도피 중인 조계사가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국민 여론이다. 현재 조계사에 머물고 있는 한 위원장은 종교가 보호해야 할 소외된 약자일까, 종교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불청객일까? 그리고 2000년 명동성당의 결정과 2015년 조계종의 결정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김민 kimmin@donga.com·김갑식·박성진 기자 
#한상균#조계사#명동성당#한국통신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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