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90년대의 별들이 나의 가슴속으로 쏟아져 내리던 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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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흐림. 90년대의 별이 쏟아지는 밤. #128. 서태지 ‘90′s Icon’ (2014년)

18일 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 무대에 선 가수 서태지. “얘들아, 안녕? 보고 싶었어!” 대신에 그는 “보고 싶었어요”라고 작게 인사했다. 서태지컴퍼니 제공
18일 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 무대에 선 가수 서태지. “얘들아, 안녕? 보고 싶었어!” 대신에 그는 “보고 싶었어요”라고 작게 인사했다. 서태지컴퍼니 제공
어젯밤 내 방에 별이 쏟아져 들어왔다면 믿을 수 있을까.

중견가수 T가 5년 만에 연 컴백 콘서트는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와 조명, 연출이 그다웠다. 그저께 경기 성남에서 슬픈 일이 있어서 난 안전 문제도 주의 깊게 봐야 했다. T의 콘서트는 평소처럼 질서정연했고 주최 측의 준비도 잘돼 있었다. 사실 공연장이 워낙 넓고 객석에 빈 공간이 있어 더 안전해 보였다.

T의 콘서트를 열 번 넘게 봤지만 이전과 공기가 좀 달랐다. 거리에서 신곡을 크게 틀어놓고 ‘태지 오빠!’를 외치며 공연을 기다리는 톡톡 튀는 복장의 팬들은 무난한 옷차림에 조용한 30, 40대 관객으로 대체됐다. 때로 남성 관객의 함성이 더 크게 들리기도 했다.

첫 곡 ‘모아이’를 피아노 반주에 맞춰 T가 감미롭게 들려줄 때, 가수 I와 듀엣으로 ‘소격동’을 부를 때 빼어났던 음향이 후반부 격렬한 곡으로 치달을 때 간혹 왜곡되긴 했지만 빠르고 화려하게 다시 편곡된 ‘내 모든 것’ ‘하여가’는 객석을 뛰게 했다.

T는 이날 예전과 좀 달랐다. 관객들에게 반말보다는 존댓말, ‘너희들’보다는 ‘여러분’이란 호칭을 많이 썼다. 첫 별이 떨어진 건 T가 신곡 하나를 부르기 전이었다. “…좋아하던 90년대 스타들 많죠? …스타들과 여러분의 인생도 같이 저물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물간 별 볼일 없는 가수가 들려드립니다.” 노래 제목은 ‘90′s Icon’.

공연 뒤, 차에 올라 20일 나오는 T의 새 앨범을 틀었다. 대개의 노래는 ‘소격동’의 감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조용한 밤’이란 큰 제목에 걸맞게 몽환적인 전자음이 출렁였고 느리고 내성적인 곡이 다수였다. 심박처럼 안정적인 리듬이 많았고, 가사는 이전에 하나의 노래 안에서도 시점과 주제가 수시로 이동했던 것과 다르게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신비와 파격 대신 체온을 전해주고 싶었던 걸까.

공연에서 들려주지 않은 ‘비록’과 ‘성탄절의 기적’은 꼭짓점이었다. ‘소격동’ ‘90′s Icon’ ‘성탄절…’은 모두 따뜻한 신시사이저가 과거를 소환하는 것처럼 여울지듯 페이드인(fade-in)되며 시작했다. 특히 ‘성탄절의…’의 여운이 길었다. ‘90′s Icon’에서 T는 ‘한물간 90's Icon/물러갈 마지막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질퍽한 망상 끝낼까… 덧없이 변해간 나는 카멜레온/내 피부가 짓물러도 조용히 감출 뿐’이라고 노래했다.

밤의 끝을 달려 닿은 곳은 친구의 장례식장. 이승환 서태지를 좋아했고 우리 밴드에서 잠깐 보컬도 했던 과 동기 D는 늘 밝은 친구였다.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다 암에 걸렸다고 했다. 십 몇 년 만에 보는 나만의 ‘90년대 아이콘’들, 그러니까 90년대 학번 선후배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그곳에 모여들었다.

어제는 이렇게 잠들어 있던 1990년대가 무너지듯 내게 쏟아져 들어온 날이었다. 벽장 속에는 녹지 않는 캔디와 아이스크림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판도라처럼 슬퍼졌다. T의 앨범 표지에 그려진 세 잎 클로버가 눈에 들어왔다.

이봐, 노트. 푸르던 날엔 늘 네 잎 클로버만 찾아다녔지. 근데 이제 세 잎만 있어줘도 좋아. 조용한 밤엔 별이 뜰 테니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서태지#소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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