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미국사회의 인종 차별에 날린 독한 한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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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폴 비티 지음·이나경 옮김/408쪽·1만3800원·열린책들

‘배반’의 화자는 흑인을 비하하는 말인 ‘니그로’를 수없이 내뱉는 등 사회적 금기를 의도적으로 넘나드는 방식으로 인종 차별을 비판한다. 영화 ‘노예 12년’에서 음악가로 자유롭게 살던 흑인 남성 주인공이 노예로 잡혀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 동아일보DB
‘배반’의 화자는 흑인을 비하하는 말인 ‘니그로’를 수없이 내뱉는 등 사회적 금기를 의도적으로 넘나드는 방식으로 인종 차별을 비판한다. 영화 ‘노예 12년’에서 음악가로 자유롭게 살던 흑인 남성 주인공이 노예로 잡혀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 동아일보DB
미셸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은 한 백인 여성이 자신을 ‘원숭이’로 조롱한 발언이라고 털어놓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영부인이었지만 피부색에 대한 높고도 견고한 편견의 벽을 또다시 확인해야 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폐지됐지만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여전하다. 흑인인 저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차별을 할 바에는 아예 과거처럼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 도서관, 학교 등을 분리하자고 제안하는 장편소설을 통해 현실을 맹렬하게 풍자한다.

이 소설은 지난해 심사위원단 만장일치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받았다. 미국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기는 48년 맨부커상 역사상 처음이다. 이 책은 화자인 흑인 남성 ‘미(Me)’의 자기소개부터 예사롭지 않다.

‘흑인 남자가 이렇게 말하면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나는 물건을 훔쳐 본 적이 없다. 세금이나 카드 대금을 내지 않은 적도 없다. 빈집을 턴 적도 없다….’

이런 그가 대법원 재판에 회부됐다. 노예를 부리고 공공연하게 인종분리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도 할 말은 있다. 그가 살던 로스앤젤레스 인근 흑인들이 주로 몰려 살던 빈민촌인 디킨스시(가상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자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이 흑인들을 결집시킨 사실을 떠올리며 이를 마을에 적용시킨다. 버스에 노약자, 장애인과 더불어 백인 우대석을 도입하고, 공공도서관의 이용 안내판을 ‘일요일∼화요일: 백인 전용, 수요일∼토요일: 유색 인종 전용’이라고 바꾼 것.

무명의 흑인 배우였던 80대 마을주민 호미니는 정체성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노예가 되기를 간청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주인이 된다. 한데 호미니는 고분고분하지 않다. 집 안에 들어온 송아지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면 “가축 돌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며 단호히 거절한다. 그는 수없이 호미니를 ‘해방’시키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노예 주인 노릇은 ‘포주 짓도 쉽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라며 투덜댄다. 흑인들의 모임은 제 시간에 시작하는 법이 없고, 흑인은 제대로 매듭도 묶을 수 없다며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놓고 비꼰다.

서글픔도 묻어나온다. 괴짜 심리학자인 그의 아버지는 경찰에 몇 마디 항의를 하다 총에 맞아 숨진다. 피 흘리며 숨져 있는 아버지를 보고도 흑인의 고통을 가르치기 위해 아버지가 꾸민 연극이라고 믿으려는 ‘미’의 모습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미’의 이야기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랩 같다. 넘실대는 말의 향연에는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와 인종 갈등으로 벌어진 사건, 미국 대중문화가 빼곡히 녹아들어 있다.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하원 구성 비율을 결정하는 인구를 산출할 때 흑인 노예를 백인 자유인의 5분의 3으로 세는 타협안이 승인된 ‘5분의 3의 타협’, 노예로 태어나 19세기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된 프레더릭 더글러스, 공공장소에서 인종분리를 시행한 짐 크로 법 등이 줄줄이 나온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이들은 자유자재로 역사와 현실을 비틀어대는 블랙 코미디에 무릎을 치고 감탄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은 각주를 일일이 확인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인종 차별의 심각성을 웃음과 눈물, 조롱으로 한바탕 고발하는 광대극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원제는 ‘The Sellout’.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배반#폴 비티#이나경#인종 차별#영화 노예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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