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욕망의 色, 빨강의 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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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암석에서 처음 얻은 붉은색, 생명과 연관된 특별한 색으로 인식
빨간색을 얻기 위한 인류의 노력과 디지털 시대 무향무취의 빨강 짚어

◇빨강의 문화사:동굴 벽화에서 디지털까지/스파이크 버클로 지음/이영기 옮김/448쪽·2만2000원·컬처룩

1530년경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작가와 모델 미상의 유채화 ‘빨간 옷을 입은 남자’. 영국 왕 찰스 2세가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로 생각하고 구입했다. 붉은 안료는 떡갈나무에 기생하는 곤충인 케르메스와 덩굴식물인 꼭두서니에서 뽑아낸 것으로 확인됐다. 컬처룩 제공
1530년경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작가와 모델 미상의 유채화 ‘빨간 옷을 입은 남자’. 영국 왕 찰스 2세가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로 생각하고 구입했다. 붉은 안료는 떡갈나무에 기생하는 곤충인 케르메스와 덩굴식물인 꼭두서니에서 뽑아낸 것으로 확인됐다. 컬처룩 제공
지난주 토요일 오전. 서울 강남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 건물 1층 커다란 옷가게 앞에 세워 놓은 빨간색 BMW 세단 한 대가 보였다. ‘차 주인이 범상한 월급쟁이는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대로변 쇼윈도에 당당하게 바짝 붙여 차를 세워 놓아서? 아니면 차가 선명한 빨간색이어서?

국산 스포츠카 광고가 TV에 처음 방영됐던 중학교 때 잠깐 말고는 빨간색 자동차에 관심 둬 본 적이 없다. 자동차에 대한 흥미조차 이제 거의 없지만 혹시 마련한다면 새까만 차 외에는 고려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왜 그 빨간 차는 기억에 불필요하게 각인됐을까.

“시선을 흔드는 ‘레드 헤링(red herring·붉은 청어)’에 속지 않아야 한다. 청어를 훈제하면 빨간색이 되는데 냄새가 아주 독해 사냥개가 이 냄새를 맡으면 후각에 혼란을 일으킨다. 잘못된 결론으로 유도하거나 논리상 오류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레드 헤링’이란 말의 의미는 여기서 유래했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피츠윌리엄박물관 소속의 회화 보존 및 복원 전문가다. 영화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 특수효과 작업에 참여했다고 해서 테런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1998년)이나 스파이더맨의 빨간색 쫄쫄이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올 수 있겠다 기대했지만 서문부터 마지막 장까지 시종 진지하다.

‘인류는 빨간색을 왜, 어떻게 얻었을까.’

줄곧 책을 관통하는 건 이 질문이다. 물감 튜브에서 언제든 아무렇지도 않게 짜내 쓸 수 있게 된 이 특별한 색깔을 얻기 위해 자연계의 갖가지 동식물과 암석을 이용해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해왔는지 조목조목 기술했다.

빨간색은 언제부터 왜 평범하지 않은 색으로 인식됐을까. 동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모닥불로 황토 암석을 가열해 빨간색 흙 부스러기를 소중히 쓸어 모았던 수만 년 전 인간은 그 색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지은이는 딱 떨어지는 답을 내놓지 않고 사유의 단서를 군데군데 흩뿌려 놓았다.

“인간이 노랑을 빨강으로 바꾸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노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ochros’의 다른 의미가 ‘생명이 없는’이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반면에 빨강은 항상 생명과 연관돼 왔다. 인간은 황토를 태워 붉은색을 얻으면 돌에 들어 있던 생명을 일깨워 다시 불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예술가도 관람객도 더 이상 자신이 사용하고 바라보는 색이 어디에서 추출되는지 알지 못한다. 화가가 쓰는 빨강은 구운 흙, 수정과 같은 결정구조를 가진 광물인 진사(辰砂)에서 수은과 황을 추출한 뒤 다시 합성해 얻은 염료인 ‘버밀리온’, 방연석으로부터 얻은 연단(붉은 납), 덩굴식물인 꼭두서니나 선인장에 기생하는 곤충인 코치닐의 사체에서 추출한 것일 수 있다. 크롬, 아닐린 등 그밖에도 수백 개의 다른 원천이 존재한다.

굳이 알 필요가 없어진 이야기일까. 6장(章)에 적힌 다음 문장은 눈앞에 놓인 빨간색을 달리 바라볼 수 있도록 시선의 틈새를 열어준다.

“잠시 빨강이었다가 다음 순간 다른 색으로 바뀌는 ‘디지털 빨강’에는 아무 질감도 없다. 균질한 화면 위의 빨간색은 위협적일 만큼 다채로운 진짜 현실로부터 가상의 욕망 쪽으로 인간을 이끈다. 디지털 루비, 디지털 딸기, 디지털 울새의 가슴 털은 모두 ‘똑같은 빨간색’이다. 광채도, 탄력과 물기도, 맥박의 떨림도 없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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