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전장의 공포… 병사들의 관심은 오직 목숨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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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참호전이었다1914-1918/자크 타르디 지음·권지현 옮김/176쪽·1만8500원·서해문집

책 말미에는 저자가 수정판을 내며 추가한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일러스트레이션 50여 장을 실었다. 포화와 시체 구덩이 앞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플루트를 연주하는 병사를 묘사한 이 그림은 1998년 제작한 것이다. 서해문집 제공
책 말미에는 저자가 수정판을 내며 추가한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일러스트레이션 50여 장을 실었다. 포화와 시체 구덩이 앞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플루트를 연주하는 병사를 묘사한 이 그림은 1998년 제작한 것이다. 서해문집 제공
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래픽노블(만화) 작가로 손꼽히는 자크 타르디(71)가 발표한 이 작품은 2014년 미국 아이스너 상을 수상했다. 그래픽노블의 선구자인 윌 아이스너(1917∼2005)를 기리는 이 상은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린다. 이번에 함께 번역 출간된 전작 ‘제1차 세계대전’ 역시 2011년 같은 상을 받았다.

작가는 서문에서 “나는 오로지 인간, 그리고 인간이 겪는 고통에만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인류가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가해 온 고통인 전쟁을 그가 필생의 과제처럼 붙들고 거듭 그려낸 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신뢰를 구축해주는 것은 소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다. 긴박함을 과장한 상황 구성, 비장미를 슬쩍 덧칠해낸 잔혹한 살상 장면, 엉뚱한 감상을 유발하는 애잔한 곁다리 에피소드…. 전쟁의 필연성을 은근히 설파하는 것 아닐까 의구심을 자아내는 숱한 할리우드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던 요소가 이 책에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나는 ‘만화로 읽는 제1차 세계대전사’를 그린 게 아니다. 전쟁에 억지로 끌려들어간 사람들이 겪은 상황을 시간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배열하려 했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간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전쟁이라는 비참한 공동의 모험에는 영웅도 주인공도 없다. 이름 없는 단말마 비명만 이어질 뿐이다.”

작가는 철저하게 원거리 관망이 아닌 눈앞의 흙구덩이 참상 속에 읽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둔다.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오래전 지구 어디선가 벌어졌던 일’로 여겨지던 막연한 이야기가 그림 속에 숨을 헐떡이며 되살아났다가 피를 뿜으며 사라진다.

서로의 얼굴 표정을 육안으로 바라보는 거리에 참호를 파고 대치한 채 전진도 후퇴도 없는 돌격과 사격을 날마다 거듭하는 병사들. 전장의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진격을 명한 여단장은 집중포화에 못 이겨 후퇴한 병사들이 가득한 아군 참호에 포격을 명령한다. 후퇴한 병사들 중 세 명이 무작위로 호명돼 총살형에 처해지고, 총살 집행은 새로 전선에 배치된 신병들의 신고식이 된다. 어떻게든 그곳에서 벗어날 궁리에 골몰하던 한 병사는 음식찌꺼기가 묻은 실을 바늘에 꿰어 팔에 꽂은 뒤 썩은 팔을 절단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한다.

유일하게 참호를 벗어난 공간에서 전개시킨 초반부 장면 역시 전쟁터의 모습 못잖게 참혹하다. 군 총동원령이 내려진 1914년 8월 2일 오후 프랑스 파리. ‘손쉽게 무찌를 독일’에 대한 증오에 흥분한 사람들로 가득 찬 노변 카페에서 한 노인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킨다. 군중의 살기에 동조하지 않은 그는 금세 첩자로 몰려 땅바닥에 처박힌다.

저자에게 전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 그의 조부는 “신이 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임종을 찾아온 신부의 종부성사 권유를 거절했다. 작가 역시 “어떤 종류의 정권으로부터든지 무엇도 받고 싶지 않다”며 2013년 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거부했다.

옛날 전쟁 이야기일 뿐일까. 전쟁을 쉽게 입에 담는 정치가들에 대한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저자는 “주인들에게 한 푼 가치도 없는 목숨을 지닌, 누군가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인간들의 사회. 이 평범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고 썼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그것은 참호전이었다1914-1918#자크 타르디#그래픽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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