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불온한’ 인쇄장이의 불꽃인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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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인 강은기 평전/김영일 지음/398쪽·1만8000원·자유문고

1970,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는 늘 그가 운영한 ‘세진인쇄’에서 찍은 인쇄물이 뿌려졌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묵묵히 ‘민주화 운동의 펜’이 되길 자처했던 인쇄공 고(故) 강은기씨(1942∼2002)다. 자유문고 제공
1970,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는 늘 그가 운영한 ‘세진인쇄’에서 찍은 인쇄물이 뿌려졌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묵묵히 ‘민주화 운동의 펜’이 되길 자처했던 인쇄공 고(故) 강은기씨(1942∼2002)다. 자유문고 제공
어두컴컴한 지하실. 고문을 준비 중인 수사관은 이죽거린다.

“네가 그 유명한 놈이구나. 한번 혼나봐라. 너 같은 놈은 죽어나가도 아무도 몰라.”

누굴까? 수많은 민주투사의 이름이 머리를 스칠 것이다. 힌트를 주자면 그는 1970, 80년대 수사기관에서 가장 많이 연행한 인사로 통한다. 스스로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비롯해 서초동(서울중앙지검), 서빙고(국군보안사령부), 장안평, 홍제동(대공분실) 등 안 가본 곳이 없다”고 말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독재정권의 위협을 무릅쓰고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지하신문이나 유인물을 제작했던 인쇄공 고(故) 강은기 씨(1942∼2002)다. 후방에서 한국 민주화를 지원한 탓에 강 씨의 공적은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고인과 함께 전북민주동우회에서 활동했던 저자는 2002년 투병 중인 강 씨를 찾아 구술작업을 통해 그의 일생을 정리했다.

책을 보면 실제 강 씨의 활동 범위는 넓지 않았다. 좁디좁은 서울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강 씨가 마음 졸이며 찍었던 인쇄물 하나하나는 1970년대부터 80, 90년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전북 남원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강 씨는 경제 사정으로 중학교를 중퇴한 후 서울로 상경한다. 1964년부터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인쇄공으로의 일생을 시작한다. 1972년에는 서울 영등포에 ‘세진인쇄’를 설립했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출범한 해다. 책 중간중간 시대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강 씨의 구술이 나와 역사적 생생함을 더한다. 인쇄소를 세운 이유에 대해 그는 “나름대로 유신헌법에 대항해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후 강 씨는 그 누구도 꺼렸던 반독재 시국선언서, 광주항쟁 화보집, 재야단체 기관지와 소식지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처음 인쇄한 것은 광주 지역의 지하신문 ‘함성’(1972년)이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다뤘다. 1973년 4월에는 유신의 부당함을 토로한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신앙 선언문을 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김재준 목사, 법정 스님 등 15명이 YMCA 강당 1층에서 발표한 민주체제 재건 시국선언문을 인쇄했다.

언론이 침묵할 때도 ‘민주화 운동의 펜’ 역할을 했다. 1973년 10월 서울대생 시위가 모든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지 않자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철야농성과 함께 언론자유 결의문을 작성했다. 이 역시 강 씨가 인쇄한 것. 인쇄를 통해 강 씨와 인연을 맺은 인물도 여럿 등장한다. 특히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과의 사이가 각별했다. 강 씨는 1983년 9월 김 전 고문이 민청련을 창립할 당시 읽었던 창립선언문을 만드는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김 전 고문은 이후 강 씨를 “천사”라고 칭했고 강 씨는 김 전 고문을 “진주(珍珠)”라고 불렀다.

정부는 반독재 유인물이 발견될 때마다 강 씨를 의심했다. 경찰, 국가안전기획부, 검찰, 중앙정보부에서 연행, 조사, 구금을 받는 생활을 수년간 이어갔다.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 당시 보안사 요원들이 강 씨를 응급환자용 앰뷸런스로 몰래 연행하는 등 강 씨가 서울시내에서 가보지 못한 경찰서나 정보기관이 없었을 정도.

그럼에도 그는 민주화 운동 유인물을 계속 인쇄했다. 감시를 피해 퇴근 후 한밤중에 다시 나와 몰래 인쇄기를 돌렸다. 1980년에는 ‘김재규 항소 이유서’를 인쇄해 줬다는 이유로 1년 1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고 후 인쇄소가 영업정지가 돼 생활고마저 겪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1985년도 연하장에 ‘송구영신(送舊迎新)’이 아닌 ‘송군영민(送軍迎民)’이라고 적어 보내며 민주화를 염원했다.

그의 인생에서 기쁜 순간은 1987년 6월이었다. 6월 민주항쟁 때 그는 승합차를 빌려 수많은 유인물을 현장에 뿌렸다. 강 씨가 가장 활짝 웃은 순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강 씨의 지사적 결기는 계속됐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의 낙선 운동을 도와 밤새 인쇄기를 돌리다 손가락이 잘려 봉합수술을 받았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강 씨의 불꽃같은 열정은 2002년 11월 꺼지게 된다. 췌장암 때문이다. 그는 현재 경기 마석 모란공원 민주인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책을 덮으면 여러 상념이 생긴다. 강 씨처럼 음지에서 묵묵히 소명을 다한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열정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졌을까? 6·25전쟁에서 산화한 무명용사에게 감사하듯 27주년을 맞은 6·29 민주화 선언에 헌신한 무명투사를 추모해 본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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