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천방지축 교실의 기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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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학교가 뭐길래/이상석 글·박재동 그림/404쪽·1만5000원·양철북

제자의 버릇없음을 교사에게 보내는 사랑의 신호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이 있다. ‘한 번 더 웃고 공부해도 늦지 않다’는 그에게 ‘좋은 교실’이란 학교가 정한 틀에 맞지 않는 아이들까지 포근하게 품어주는 공간이다. 양철북 제공
제자의 버릇없음을 교사에게 보내는 사랑의 신호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이 있다. ‘한 번 더 웃고 공부해도 늦지 않다’는 그에게 ‘좋은 교실’이란 학교가 정한 틀에 맞지 않는 아이들까지 포근하게 품어주는 공간이다. 양철북 제공

박재동 화백의 손끝에서 탄생한 개성 넘치는 인물 삽화는 이 책을 ‘읽는’ 재미에 ‘보는’ 재미까지 더한다.
박재동 화백의 손끝에서 탄생한 개성 넘치는 인물 삽화는 이 책을 ‘읽는’ 재미에 ‘보는’ 재미까지 더한다.
고교 3학년 때 일이다. 3년째 국어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께서 나를 포함해 동급생 서넛을 매주 토요일 오후 빈 교실에 남겨 문학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들이 본고사며 논술고사를 보던 그 시절 족집게 학원 강의나 고액 과외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지방도시 변두리 학교 학생인 제자를 위해 수업 봉사를 자처한 것이다.

몇 달 후, 부모들은 감사의 표시로 선생님께 식사를 대접했다. 자식들에겐 비밀로 하고 몇만 원씩 촌지를 걷어서는 케이크 속에 감춰 마다하는 선생님 손에 억지로 들려 보냈다. 토요일 오후, 여느 때처럼 나타난 선생님 손에는 큰 상자가 들려 있었고, 그 속에는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책을 나눠주며 “너희들 볼 면목이 없다.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게 아니다”라며 “이렇게밖에 돌려드릴 수 없는 죄송함을 부모님께 잘 전해 달라”고 하셨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요즘도 어머니는 “○○○ 선생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니?” 하며 아들에게 그 선생님의 안부를 묻는다.

오래전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오랜만에 이 책에서 그때 국어 선생님께 맡았던 향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교사생활 25년째, 해직교사 출신으로 부산의 한 공업고등학교에 국어 교사로 부임한 저자가 담임을 맡은 학급은 학생들이 챙길 수업 준비물부터 독특하다. 참고서나 공책, 필기구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열린 마음’ ‘편안한 자세’ ‘마음 놓고 말하기’란다.

‘차렷, 경례’ 하는 군대식 인사 대신에 ‘바로 앉읍시다. 맞절’ 하는 인사로 수업을 시작하는 것은 기본. 수업 중에 학생이 졸면 교사는 “내 수업이 지겨운 탓”이라며 자책한다. 조회 시간에 늦었다고 운동장 ‘뺑뺑이’를 도는 일도, 교무실로 끌려가 매 맞는 일도 없다.

이런 학교 풍경이 가능한 것은 저자의 교육 목표가 ‘아이들이 자기 생각과 느낌을 마음 놓고 말이나 글로 드러낼 수 있고, 자기 존엄을 알고 당당히 드러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교단 일기와 독백 형식으로 전하는 제자들과의 좌충우돌 ‘웃고픈’(웃음이 나지만 울고 싶은) 일상생활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퇴락한 공업단지의 배후지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선 학생의 3분의 1이 학비 지원을 받을 만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많다. 한부모 가정, 조손 가구가 많아 아이들은 사랑과 정에 주려 있고 대다수는 졸업 후 진학이 아닌 취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설령 취직이 돼도 대물림된 가난에서 탈출하기 어렵다는 눈치를 챈 아이들이 학교나 선생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는 오래. 공부는 대놓고 피하려 하고 머릿속에는 학교 담장 밖 어른들의 세계를 기웃댈 생각만 가득하다.

이 책은 이런 제자들을 말없이 보듬는 스승이 느끼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오롯이 전한다. 거친 세상에 나아갈 때 필요한 ‘자존심’과 ‘심지’ 하나만큼은 세워주고픈 열의와 조바심도 빼놓을 수 없다. ‘전국 일제고사’나 ‘소지품 검사’처럼 실업계 아이들의 패배의식을 부추기고 아이들을 규율 속에 가두는 것을 교육의 본질로 착각하는 학교 현실에 대한 분노도 녹아 있다.

저자가 밤늦게까지 달동네 쪽방으로, 옥탑방으로 다리품을 팔아가며 진행한 가정방문 기록을 담은 2부 ‘가난이 너희를 키웠구나’를 읽다 보면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다. 계절을 앞서간 얇은 봄 점퍼, 색 바랜 교복 셔츠에서 제자의 팍팍한 삶을 읽어내고 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려고 몸과 마음의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 저자의 모습은 왜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라고 하는지 절로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이 교실개혁의 성공담이나 장밋빛 청사진만 담고 있지는 않다. 저자는 끝내 자퇴를 하고 학교를 떠나는 제자를 바라보며 교육자로서의 한계를 토로하기도 하고, 순간의 화를 못 참고 학생에게 손찌검한 사실을 고백하며 자기 내면의 폭력성과 위선을 반성하기도 한다.

책 이곳저곳에 배치된 제자들이 창작한 시와 수필은 이 책에 윤기를 더한다. 천방지축인 줄만 알았던 아이들의 성숙한 영혼과 세상을 보는 꾸밈없는 시선이 오롯이 느껴진다. 글쓰기와 말하기 수업에 대한 풍성한 노하우도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어 글쓰기 교육 지침서로도 손색없다. 아이들의 사진을 일일이 참조해 개성을 담뿍 담아낸 저자의 친구 박재동 화백의 인물 삽화도 책 읽는 맛을 더해준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도대체 학교가 뭐길래#선생님#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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