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당신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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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한강 지음/216쪽·1만2000원·창비
5·18 광주 영혼들의 못다한 말… 소설가 한강이 詩的 문장으로 그려

김병관 제공
김병관 제공
한 편의 나직한 레퀴엠이다. 지난날을 날짜로만 기억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어깨를 붙드는 손이다. 작가가 되살린 1980년 5월 광주는 참혹하고 간절하다. 파괴된 영혼들의 못다 한 말은 소설가 한강(사진)의 시적인 문장으로 다시 적힌다.

이야기 가운데에는 5월 광주의 상무관이 있다. 그곳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도왔던 중학교 3학년 동호와 그 주변 인물이 ‘그 도시의 열흘’을 증언한다. 소설은 상무관에 머무르게 된 동호를 ‘너’로 지칭하는 2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한다. 친구 정대가 총 맞는 것을 목격한 열다섯 살 소년은 집에 가자는 엄마의 권유에도 상무관을 떠날 수 없다. 죽은 몸들은 시취를 뿜어내는 것으로 또 다른 시위를 하는 것 같다. 영혼이 어린 새처럼 날아가 버린 듯한 주검들을 위해 동호는 양초에 불을 붙인다.

동호와 같이 상무관에 있을 때 수피아여고 3학년이었던 은숙은 이후 작은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한다. ‘전두환 타도’ 구호가 끊이지 않는 시절, 원고 검열 문제로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양장점 점원이었다가 상무관에 합류한 선주는 끔찍한 성고문의 기억을 묻어둔 채 비틀비틀 살아간다.

그때 대학생이었던 진수는 수감 생활로 인한 트라우마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진수의 짧은 생애를 전하는 수감 동기의 입을 빌려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 잔혹함에 대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어느 누구도 5·18 이전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검열관이 먹칠해버린 문장을 은숙은 되새긴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1970년생인 작가는 당시 열 살이었다. 서울 수유리 언덕배기 집에서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하는 말을 들었다. “ㄷ중학교에서만 셋이 죽고 둘이 실종됐는디….” 작가의 아버지, 소설가 한승원은 1970∼1979년 광주 동신중 교사였다.

작가는 2013년 11월 창비 문학 블로그 ‘창문’에서 이 소설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 심장 가운데에서 결코 내가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야기와 마주쳤다”고 했다. 2014년 1월 연재를 마치면서는 이렇게 썼다. “왜 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의심을 품고 살아왔을까, 하는 질문 속에서 이 소설을 시작했습니다. 이 소설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소년이 온다#한강#5·18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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