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상자 나르다 터져나온 詩 한 다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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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멍게’ 낸 성윤석 시인

마산어시장에서 일용잡부로 생선을 나르고 손질하는 성윤석 시인. “마산에 내려올 즈음 나는 절벽을 오르다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내게 주어진 고통을 축제처럼 여기며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뜨겁게 시를 쓰려고 한다.” 창원=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마산어시장에서 일용잡부로 생선을 나르고 손질하는 성윤석 시인. “마산에 내려올 즈음 나는 절벽을 오르다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내게 주어진 고통을 축제처럼 여기며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뜨겁게 시를 쓰려고 한다.” 창원=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야심 차게 추진한 바이오벤처기업이 자금 부족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대기업 연구소의 잇단 러브콜, 해외 업체와의 줄지은 미팅 대신 주먹질과 소송, 억대의 빚이 남았다. 절친한 함성호 시인에게 털어놨다. “나도 어쩔 수 없나봐…, 한강다리 갔다 왔다.” 함 시인이 그랬다. “집에서 가까운 일산대교 놔두고 뭣 하러 한강까지 갔냐?” 그 순간, 성윤석 시인(48)은 찬물을 맞은 듯했다. 그리고 지난해 봄 식구들과 창원으로 내려갔다.

성 시인은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하지만 문학판은 도통 재미가 없었다. 산업단지에 가면 가슴이 뛰었다. 부산에서 섬유회사를 운영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까닭이라 여겼다. 지방신문 기자, 마산시청 시보 담당 공무원, 장묘사업가를 거쳤지만 화학 실험을 하고 신물질을 개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짜릿했던 그였다.

낙향을 결정한 뒤 시인은 1.5t 트럭을 불러 가진 책을 모두 고물상에 넘겼다. 폐지 값도 안 받았다. 다 망한 마당에 문학이고 뭐고, 전부 다 버리자는 마음이었다.

40년 넘게 마산어시장을 지켜온 처가에서 작은 집을 얻어줬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어진 시인은 날마다 소주를 털어넣으며 폐인으로 살았다. 어느 날 새벽, 눈을 떴더니 저 구석에서 아내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시인은 마산어시장 장모의 생선가게로 출근했다. 큰처남에게 오토바이 모는 법도 배웠다.

“처음 몇 달은 ‘철인 14종’ 경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냉동 생선상자 나르다가 꾸벅 졸고, 생선 손질하다가 칼날에 손 베이기 일쑤였다. 생선 가시는 수시로 살을 푹푹 파고들었다. 어느 날은 명태가 때리고 다음 날은 고등어한테 맞고 갈치가 찌르고…. 모든 일을 전천후로 하는 마산 어시장 잡부가 되고선 두 달 만에 14kg이 빠졌다.”

문학은 다 버렸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냉동실에서 생선을 꺼내 몇 군데 배달하고 나면 6시. 아침식사하고 또 배달하고 납품 준비하고 점심 먹고 또 상자 나르고 냉동창고 정리하고. 귀신 들린 듯 시가 툭툭 튀어나왔다.

생선상자를 오토바이에 싣고 바닷가를 달리다가, 고등어 배를 따다가, 손님과 싸우다가 언뜻언뜻 시가 지나갔다. 영수증 뒷면, 생선상자 귀퉁이, 주문서의 좁은 여백에 시를 썼다. 바다 냄새 가득한 주머니에 꼬깃꼬깃한 시가 수북이 쌓였다.

지난해 5∼8월 마산어시장에서 터져 나온 시편들이 최근 출간된 시집 ‘멍게’(문학과지성사)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모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시였고, 어시장 사람들의 애잔한 생으로 시를 짰다. 멍게 문어 상어 해월(해파리) 임연수 호루래기(오징어 새끼)도 등장한다. 마산 어시장 시에선 짭짤한 내음이 풍긴다. 눈물 맛이 난다. 시인은 “내보내지지 않는 어떤 슬픔이 결국은 다시 시를 쓰게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시집 수록작으로 창원시립 마산박물관에서 5월 31일까지 ‘어시장 시 특별전’이 열린다.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버린다. 어물전에선/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대한 입들이여./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멍게’)

창원=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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