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나온 책, 대박과 도박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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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출판계, 간접광고 마케팅

13일 오후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 특별전에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책이 전시돼 있다. 예술 분야 전문 2인 출판사였던 다빈치가 2000년 펴낸 이 책은 SBS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 등장한 뒤 4개월 만에 6만 부가 팔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3일 오후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 특별전에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책이 전시돼 있다. 예술 분야 전문 2인 출판사였던 다빈치가 2000년 펴낸 이 책은 SBS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 등장한 뒤 4개월 만에 6만 부가 팔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지난달 31일 방영된 SBS 드라마 ‘상속자들’ 8회. 주인공 김탄(이민호 분)의 침대에는 임현정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과 김언희 시집 ‘요즘 우울하십니까?’가 놓여있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펴낸 시인선 시집이다. 침대에 누운 김탄은 임현정 시집을 집어 든다. 제목의 ‘사’ 자에 작대기를 그어 ‘꼭 같이 자는 것처럼’으로 고친 다음 표지 사진을 찍어 여주인공 차은상(박신혜)에게 보낸다.

이처럼 ‘상속자들’에는 간접광고(PPL) 계약을 맺은 문학동네 책들이 계속 노출되고 있다. 드라마 배경인 제국고에서는 문학동네 시집의 시를 읽어주는 방송이 나온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극중 드라마 전개 복선을 암시하며 등장했다.

PPL 효과는 얼마나 될까.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 임현정 시집은 드라마 방영 전 2주간 단 1권이 팔렸지만 방영 후 같은 기간 60권이 팔렸다. 방영 전 130권이 팔린 ‘위대한 개츠비’는 방영 후 200권이 나갔다. 예스24 문학담당 김희조 MD는 “최근 PPL 책은 드라마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거나 결말을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세계 고전 분야의 책이 주목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 전속 PPL은 수억 원?

출판계에서 ‘상속자들’은 방영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드라마 대본을 쓴 김은숙 작가의 이전 드라마에 나온 책들이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됐기 때문.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0년)에서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비룡소)가 나와 한 달 만에 12만 부가 팔렸다. 문학동네와 PPL 계약을 한 ‘신사의 품격’(2012년)에서는 신경숙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2010년)가 등장해 베스트셀러 목록에 재진입하기도 했다.

지난해 ‘신사의 품격’의 PPL 계약금은 1억 원 선으로 알려졌다. ‘상속자들’ 제작사 관계자는 “구체적 계약금은 밝힐 수 없다. PPL 계약을 할 때는 책 노출 조건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에 따라 결정된다. 책은 출판사에서 홍보하고 싶은 책과 작가가 드라마 전개상 녹이고 싶은 책을 절충해 정한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염현숙 편집국장은 “드라마 PPL로 매출액을 올린다기보다 영상 매체에 익숙한 시청자를 신규 독자로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A출판사는 조만간 방영 예정인 케이블TV 드라마에 주인공이 책을 들고 잠깐 읽는 모습을 노출하는 조건으로 제작사로부터 3000만 원을 제의받았다가 거절한 바 있다. 대형출판사에는 드라마 제작사의 PPL 제안서가 꾸준히 돌고 있다. A출판사 관계자는 “당장 TV에 나오면 책이 잘 팔리겠지만 1, 2만 부만 나가선 오히려 손해를 본다. 비싼 PPL 비용을 생각하면 도박에 가깝다고 생각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 진짜 대박은 ‘우연의 대박’을 따른다

하지만 TV 드라마에 등장해 대박 난 책은 정식 PPL 계약을 한 책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년)에 나왔다가 100만 부가 팔린 미하엘 엔데의 ‘모모’(비룡소)의 성공 이후 출판사도 몰랐던 ‘우연의 대박’이 이어지고 있다.

SBS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주인공 김탄(이민호 분)이 PPL 계약을 하고 드라마에 노출된 문학동네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을 한참 응시하고 있다.
SBS TV 화면 캡처
SBS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주인공 김탄(이민호 분)이 PPL 계약을 하고 드라마에 노출된 문학동네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을 한참 응시하고 있다. SBS TV 화면 캡처
문학동네만 해도 PPL 계약을 맺은 ‘상속자들’이 아닌, 다른 드라마에 깜짝 등장한 책이 특수를 누리는 바람에 환호했다. 13일 방영된 ‘상속자들’과 동시간대 경쟁 드라마 KBS ‘비밀’에 나온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은 마지막 회를 앞두고 드라마 결말을 암시해 인터넷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며 폭발적 관심을 모았다. 문학동네 염현숙 편집국장은 “드라마에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14일 아침부터 주문이 밀려와 2500여 권을 출고했다”고 밝혔다.

6월 29일 방영된 SBS 주말드라마 ‘결혼의 여신’에 나온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다빈치)은 최근까지 6만 부가 팔렸다. 2000년 출간 이후 방영 전까지 1만 부도 팔리지 않은 책이었다. 드라마에 책이 나온 것도 몰랐던 출판사는 다음 날 밀려오는 주문 전화에 어리둥절해했다. 일본 동화 ‘가부와 메이 이야기’ 시리즈(전 6권·아이세움)도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 나온 다음 매년 1000세트 팔리던 책이 2만 세트가 팔렸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PPL은 영상매체의 영향력에 기대 쉽고 편하게 가려는 방식이라 긍정적으로만 보기 어렵다. 일회성 방송 노출로 승부하려 하지 말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마케팅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간접광고#출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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