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무 오 나의 키친]봄을 알리는 채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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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 ‘오 키친’ 셰프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 ‘오 키친’ 셰프
그린!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차 여행을 시작한 지 1주일 이상 지났는데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초록색이 폴란드에 들어섰을 때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1972년 2월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나홋카로 가서 기차를 여러 번 바꿔 타고 간 마지막 목적지는 영국이다. 나의 영웅 비틀스의 노래와 삶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동안 날씨는 영하 20도로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열차는 가끔 정차했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서는 재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날씨를 정확히 감지하지 못한 두 명의 미국인이 샤워를 마치자마자 정차된 기차에서 내렸다가 낭패를 당했다. 머리카락이 바로 얼어 버린 것.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언 머리카락을 만지니 구운 김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머리의 절반가량이 까까머리가 될 정도로 무서운 추위였다.

식사 때면 없는 메뉴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메뉴가 돌려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불가능한 메뉴가 대부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하는 것마다 다 팔렸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트’를 주재료로 사용하면서 부재료로 감자나 양배추, 돼지고기 조각을 넣은 요리가 주문할 수 있는 유일한 메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비트를 본 적도 없고, 먹어 본 적도 없지만 이를 사용한 ‘보르시 수프’는 핑크색이 예쁘고 신기하고 맛도 좋았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길 기다린다. 봄은 산나물 반찬에서 시작된다. 나라마다 느끼는 봄은 그 나라가 품고 있는 채소마다 다른 것 같다. 일본은 고대부터 ‘일곱 가지 봄 약초’로 부르는 초봄 채소들이 있다. 미나리, 냉이, 순무, 무 등의 채소들을 잘게 썰고 다져 죽을 만들어 먹으면 병과 잡귀를 물리친다고 한다.

새우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 요리.
새우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 요리.
서양 요리에서 봄의 상징은 아스파라거스다. 나는 요즘도 텃밭에서 아스파라거스를 키우고 있는데, 딱딱한 흙이 갈라져 파란 새순이 올라오는 순간 봄을 느낀다. 내가 봄이 되면 항상 넣게 되는 메뉴는 수란을 곁들인 민들레 샐러드다. 어릴 적부터 민들레를 토끼의 밥으로만 인식했던 나에게 프랑스 출신인 나의 보스는 대대로 집안에서 내려온 레시피를 가르쳐주었다. 베이컨을 바삭 구워 내 곁들이고, 남은 기름으로 드레싱을 만든다. 달걀의 부드럽고 편안한 감촉은 쌉싸래한 봄 채소들과 신비한 조화를 이룬다.

쑥, 유채, 민들레의 쓴맛이 봄의 상징이라면 시금치, 양배추, 무, 배추와 같은 겨울 채소들은 달콤한 맛이 나는데 영하 5도까지 견딜 수 있도록 스스로 당분을 품어 조절하는 자연의 조화인 것이다.

오키나와의 봄은 일찍 온다. 벚꽃이 피는 시기도 1월 말과 2월 초 사이로 보통 설과 일치한다. 나의 유년 시절 설은 정말 거창했다. 키우던 염소를 나무에 묶어 목을 베고, 양동이에 피를 받았다. 그 사이 돌 밑에 장작불을 피워 뜨겁게 데워진 돌덩이 위에 잡은 염소를 올려 털을 제거한다. 할머니는 여자들에게는 염소 육회와 국밥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는 쑥을 따오라 지시하셨다.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쑥은 금방 한 광주리를 모을 수 있었다. 국이 다 끓었을 무렵 넣어 염소 내장의 잡냄새를 없애고 어린 쑥의 부드러운 맛과 향을 살린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 상을 차린 후 아이들은 자기 엄마 옆에 자리했다. 잔치가 끝날 때쯤 되면 모든 남자가 아오모리(오키나와 소주)에 취해 있었다. 할아버지가 샤미센이란 악기를 연주하면 노래와 춤으로 이어져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의 겨울은 길고 춥다. 요즘 아내는 봄동 겉절이와 무밥에 달래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간단한 밥상을 차려 준다. 달콤한 겨울 무와 봄 향기 가득한 달래는 내가 어디에 살든지 따뜻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약간은 다른 향으로….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 ‘오 키친’ 셰프
#아스파라거스#봄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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