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수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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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그럴듯하지만 아리송하다. ‘수박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이야기다. 교산 허균(1569∼1618)은 ‘성소부부고’에서 수박의 한반도 전래를 알린다. “수박은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에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 돌아왔을 때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과(冬瓜·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 것이 그 다음이다.”

홍호(1088∼1155)는 중국 남송시대의 관리다. 홍다구(1244∼1291)는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할 때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다. “홍다구가 개성에 수박 씨앗을 심은 것이 홍호가 강남에 돌아왔을 때보다 앞선다”는 허균의 말은 틀렸다. 홍호는 홍다구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홍호가 수박을 봤을 리도 없다. 수박은 열대성 과일이다.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15년 후 남송으로 돌아왔다. 금나라는 북쪽에 있던 유목민족의 국가다. ‘홍호의 수박 전래설’도 믿기 어렵다. 수박은 12세기경 서역에서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정된다. 고려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홍다구에 의해서일 가능성은 있다.

수박은 ‘서과(西瓜)’라고 불렀다. 서쪽에서 온 오이 혹은 참외라는 뜻이다. 서쪽은, 중국을 중심으로 셈한 것이다. 오늘날 우루무치 일대와 그 서쪽, 서역을 가리킨다.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수박을 두고 ‘서역에서 온 특이한 품종/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가/녹색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둥근 몸은 부처의 머리와 같다’(‘옥담사집’)고 했다.

‘과(瓜)’는 오이류를 총칭하는 단어다. 위의 ‘동과’는 동아다. 지금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 채소다. 박처럼 생겼으며 길쭉하다. 참외는 ‘진과(眞瓜)’ 혹은 맛이 달다고 ‘첨과(甛瓜)’로 불렀다.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는 ‘고려도경’을 인용해 “고려에는 능금, 복숭아, 배, 대추 등과 더불어 ‘과’가 있다”고 했다. ‘고려도경’의 ‘과’가 서과 즉, 수박일 가능성도 희박하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온 것은 1123년이다. 홍다구의 시대는 그 이후다.

수박의 전래에 대해서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1814∼1888)의 말이 믿을 만하다. “수박은 원나라 초기 이미 중국 절강성 등에 있었다. 송나라 말기의 기록에도 서과가 나타난다. 송나라 사람 호교(胡嶠)가 ‘함로기(陷虜記)’에서 ‘우루무치(회흘)에서 서과 종자를 구했다’고 했으니 송나라 때 서과는 천하에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 평안도의 능라도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임하필기’). 여기서 한반도 전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우루무치-중국 전래설’은 믿을 만하다.

수박은 고려 말기에 한반도에도 널리 전파되었다. 목은 이색(1328∼1396)은 ‘수박을 먹다’라는 시에서 ‘마지막 여름이 곧 다해 가니/이제 수박(西瓜)을 먹을 때가 되었다/…/하얀 속살은 마치 얼음 같고/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다’(‘목은시고’)고 했다.

조선 초기인 세종 때는 연이어 ‘수박 도둑 사건’이 일어난다. 세종 5년(1423년) 10월, 궁궐의 주방을 담당하던 내시 한문직이 수박을 훔쳤다. 그는 곤장 100대를 맞고 영해로 귀양을 떠났다. 세종 12년(1430년) 5월에는 궁궐 내섬시 소속 종(奴) 소근동이 주방에 들어가 수박을 훔쳤다. 목숨을 잃을 죄다. 다만 상한 수박을 훔쳤으니 곤장 80대만 맞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1731∼1783)은 수박을 이용한 수학 문제를 내놓는다. ‘자른 자리가 원이 되도록 수박을 잘랐더니 그 원의 지름이 5촌이고, 수박의 중심까지의 거리인 심후(心厚)는 5푼이다. 이 수박의 지름을 구하라.’ 정답은 ‘1척 3촌’이라고 나와 있다(‘담헌서’).

수박은 귀하게 사용되었다. 여름철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으로 앵두, 보리, 수박, 참외 등이 등장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여름철에는 각별히 수박을 지급했다. 조선 후기 문신 윤기(1741∼1826)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초복에는 개고기 한 접시, 중복에는 참외 두 개, 말복에는 수박 한 개를 준다’고 했다(‘무명자집’).

당뇨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박을 귀하게 여기며 먹었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10년 묵은 소갈병이 수박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낫는 듯하다. 약재보다 수박이 오히려 낫다’고 했다(‘사가시집’).
 
황광해 음식평론가
#성소부부고#수박#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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