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 때 만화 ‘사회악’ 취급… 갓난아기 알몸 그림도 검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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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계 리얼리즘의 선구자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은 “놀고 즐기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 본성인데, 한국 사회는 이런 희로애락을 터부시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은 “놀고 즐기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 본성인데, 한국 사회는 이런 희로애락을 터부시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대한민보’에 발표된 이도영의 삽화(1909년)로부터 한국 만화는 시작됐다. 그의 만화는 세태를 풍자하고 민중 계몽을 담아냈다고 해서 일제로부터 ‘먹칠’된 채 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광복 이후에도 검열은 계속됐다. 독재정권은 만화를 ‘6대 사회악’으로 지목해 탄압했다. 1980년대엔 사전검열이 당연한 듯 벌어졌다.

서슬 퍼런 시기, 심의·검열기관에서 주는 상을 거부한 만화가가 있다. ‘골목대장 악동이’ ‘삼국지’ 등 작품으로 유명한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65)이다. 7월 9일까지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빼앗긴 창작의 자유’전을 여는 그를 18일 만났다.

그는 1988년 ‘골목대장 악동이’로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가 주는 ‘한국만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만화의 심의·검열을 관장하는 기구에서 준 상을 어떻게 받느나”며 거부했다. 당시 함께 수상자 명단에 오른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작가와 ‘질 수 없다’의 허영만 작가도 거부 대열에 동참했다. 이 이사장은 “나를 순치(馴致)시키려 상을 주는 것 같아 영광스럽지 않았다. (수상 사실이) 평생 흉터로 남을 듯해 이틀 고민하다 상을 반납했다”고 했다.

“만화는 늘 싸구려, 불량, 하위문화라는 인식 때문에 계도의 대상이 되어 왔죠. 부당한 권력이 총칼로 나라를 잡아놓고 정의사회를 구현한답시고 만화를 희생양 삼은 겁니다.”

‘리얼리스트’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종종 심의·검열의 대상이 됐다. 벌거벗은 갓난아이를 그렸다는 이유로 검열당해 기저귀를 그려 넣은 ‘거미줄’의 한 장면(첫번째 그림)과 노동운동을 주제로 삼아 수차례 심의에 걸린 ‘억새’(두번째 그림).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제공
‘리얼리스트’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종종 심의·검열의 대상이 됐다. 벌거벗은 갓난아이를 그렸다는 이유로 검열당해 기저귀를 그려 넣은 ‘거미줄’의 한 장면(첫번째 그림)과 노동운동을 주제로 삼아 수차례 심의에 걸린 ‘억새’(두번째 그림).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제공
환상과 허구를 주로 다루던 한국 만화계에서 현실을 그대로 그려온 그는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불린다. ‘사실’을 쉬쉬하던 시대에 사실주의자였던 그는 걸핏하면 검열의 표적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거미줄’(1982년)이다. “두 쌍둥이 소년이 갓 태어난 장면이었는데 ‘성기가 보인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렸죠. 모태에서 막 나온 아이들이 기저귀 차고 옷 입을 새가 있겠습니까.”

민주정부하에서도 만화는 여전히 사회악으로 간주됐다.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 기소 사건이 대표적이다. 1997년 미성년자보호법이 개정되고 ‘불량만화 처벌’ 조항이 생겨났다. 검찰은 “강간, 윤간, 수간 등 비윤리적인 성교 장면이 너무 많고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와 과도한 폭력성 등의 문제가 있다”며 이 작가를 기소했다.

“야만적이지 않은 신화가 있나요? 그리스, 중국, 일본 신화에도 이런 이야기는 넘쳐납니다. 문명이 정착되지 않은 야만의 시대였기에 야만적으로 그린 건데 그걸 걸고넘어진 거죠.” 6년을 끌어온 긴 소송은 2002년 법 조항이 위헌 판결됨에 따라 이 씨의 무죄로 마무리된다.

40년을 만화가로 살던 그는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동료, 선후배 작가들의 창작 환경을 지원하는 위치가 됐다. 평생을 표현·창작의 자유 확대를 위해 살아왔다는 그는 “자유 확장에 걸림돌이 있다면 하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동료이자 식구”라고 했다.

“지금은 우리 만화가들에게 큰 자유가 주어지는 편입니다. 자유를 누리려면 책임을 져야지요. 작가로서 소명을 갖고 책임감 있게 만화를 그리는 분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한국 만화계 리얼리즘 선구자#이희재#골목대장 악동이#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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