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84〉푸른 눈과 하얀 피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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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을 갖고 싶은 소녀가 있다. 소녀는 영화에 나오는 백인 여자들의 눈이나 자기가 갖고 있는 백인 인형의 눈을 닮고 싶다.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을 것 같고 폭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비현실적이지만 허황한 생각만은 아니다.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었다면 제대로 된 환경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인간답게 살았을 테니까.

흑인 소녀의 이름은 피콜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에 나오는 인물이다. 소녀가 꿈을 이루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소녀는 자신이 푸른 눈을 갖게 됐다고 믿는다. 결국 미친 것이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라서 아득한 과거의 일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피부색이 차별의 이유가 되는 미국 사회니까.

어디 미국뿐이랴. 차별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에게도 있다. 김재영의 소설 ‘코끼리’를 보면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코끼리의 나라 네팔에서 온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가 까무잡잡한 소년. 소년은 다른 한국인들처럼 피부색이 옅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보호색을 띤 나방처럼 한국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왕따’가 되거나 아이들이 쏘는 BB탄 장난감 총의 표적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아침마다 표백제를 풀어 세수를 하고 저녁이면 거울을 보며 얼굴이 얼마나 하얘졌는지 확인한다.

미쳐버릴 정도로 푸른 눈을 갖고 싶어 하거나 피부색이 옅어지기를 바라며 표백제로 세수를 하는 일이 현실에서 그리 흔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스토리 뒤에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차별과 상처의 그림자들이 아른거린다. 그 그림자들을 조금씩이라도 걷어내려는 노력,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윤리적 역량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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