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기홍]‘이석기’는 종북세력 종말의 서막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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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진보의 그늘’ 저자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진보의 그늘’ 저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실패는 운동권 내부에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당시 운동권의 주류는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에 의해 억압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아예 현존 체제의 폭력적 전복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바뀐다. 이 중 일부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우리 민족이 수립한 사회주의 북한과 연대하지 않는 혁명은 위선이라며 북한의 혁명노선을 적극 수용한다.

그러나 1989년에 시작된 동유럽과 구(舊)소련의 붕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을 추구했던 운동가들을 깊은 고민에 빠뜨렸고, 결국 대다수가 운동권을 떠나 생업이나 유학으로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그러나 ‘NL주사파’만이 붕괴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비가 오는데 왜 평양에서 우산을 써야 하느냐”는 논리였다.

그해(89년) 북한은 사회문화부 부(副)과장 윤택림을 남파해 남한 주사파의 창시자인 김영환과 접촉했고, 이는 1992년 3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창당으로 이어진다. 민혁당 외에도 92년에 적발된 중부지역당, 94년의 구국전위, 2006년의 일심회, 2011년의 왕재산 모두 1980년대 주사파 학생운동에서 출발한 인물들이 만들거나 관여한 조직이다. 이 조직들은 남한에서 먼저 시작됐더라도 결국 귀결은 북한과의 연계였고, 목표는 ‘남조선 혁명’이었다.

한국의 종북 지하당은 역사가 길다.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1979년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가 있었다. 통혁당은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정전(停戰) 이후 최초의 남한 내 지하당이었다. 통혁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 ‘반제민전’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대남선전을 수행했다. 남민전은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된 이재문이 조직을 결성해 활동하면서 북한과 연계하기 위해 일본에 조직원까지 보냈다.

남한 내 종북 지하혁명세력의 뿌리는 깊지만 시간이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60, 70년대 지하당 사건 관련자들 중 일부는 아직도 각종 종북단체 원로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제 생물학적인 한계에 다다랐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북한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에 걸쳐 10만 명을 넘었던 것으로 추산된 주사파의 대다수도 이제 대부분 운동권을 떠났다.

그러나 여진은 남아 있던 셈이다. 이석기는 민혁당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의 창립 중앙위원으로 80년대 주사파의 적자(嫡子) 중 한 사람이다. 단선연계(單線連繫), 이른바 점조직으로 이루어지는 지하조직은 한번 노출되면 조직 재건이 쉽지 않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석기는 민혁당 사건으로 실형까지 살았으면서도 출소 후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지하조직 RO를 재건하고, 세력을 확장해 합법정당인 통합진보당의 주도권을 장악해 국회에까지 진출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이석기의 수완과는 별도의 시대적 배경이 있다. 바로 90년대 후반 종북 주사파 세력에 관용 정책을 펴온 진보 정권의 집권이었다. 특히 진보진영의 반미 민족주의는 통합진보당까지 동지로 용인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종북 세력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종북 혁명세력의 역사를 총괄해 보면, 이석기 그룹처럼 정당을 장악하고 국회까지 진입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집단이 존재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종북 혁명세력의 역사적 종말을 고하는 서막이라고 본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진보의 그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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