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장관도 약속 못지키는 나라

  • 입력 2001년 1월 26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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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념(陳稔) 재정경제부 장관이 갑작스레 다보스회의 참가를 취소한 것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 정부 책임자들의 의식 수준, 그리고 정책 결정 과정의 후진성을 국내외에 그대로 드러낸 부끄러운 ‘사변’이다.

다보스회의는 매년 초 세계 유수한 국가의 경제 지도자들과 성공한 경영인들이 스위스에 모여 국제 경제의 흐름을 읽고 방향을 제시하는 품격 높은 토론장이다. 진 장관은 이 자리에서 우리 경제의 실상을 알리고 외국 투자가들의 협조를 구하는 3개 모임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일부러 마련해서라도 가져야 할 자리를 개막 사흘 전에 스스로 박차고 불참한 것은 경제살리기를 그렇게 강조해 온 정부의 의지를 의심케 하는 일이다.

더 한심한 것은 불참이 결정된 과정이다. 본인은 22일 오전까지만 해도 출국을 전제로 행동했지만 오후에 갑자기 방향이 바뀌었다. 우리 정부 안에서 진 장관의 해외 출장을 취소시킬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본인의 판단착오”였다는 진 장관의 26일 해명에도 불구하고 관가에서는 대통령의 설 연휴 구상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청와대측 요청 때문에 그가 출국할 수 없었다는 소문이 지배적이다. 사실이라면 청와대가 사안의 경중과 일의 우선 순위를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참석을 결정하거나 또 전격적으로 불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정부 시스템에 의해 면밀하게 검토됐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국제회의 진행이야 어떻게 되든, 그래서 그곳에 참석한 저명 인사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게 되든 관계없이 철저하게 임명권자 편의만 생각하면 되는 일인가. 그 결정 과정에 깔려 있는 독선적 사고, 경직된 시각이 문제다.

특히 아쉬운 것은 정부가 국무위원의 국제회의 참석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함에 따라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 행동의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일이다. 장관조차 한치 앞 자신의 일도 모르는 판이라면 예민한 자금시장이 그런 정부의 경제 정책을 얼마나 신뢰하기를 바랄 수 있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우리는 크고 작은 정부의 결정이 이처럼 권력의 핵심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뤄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그로 인해 국제적 신의를 잃고 환란을 통해 그 대가를 엄청나게 치러야 했다. 진 장관의 경우는 바로 그런 점에서 사소한 일이 아님을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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