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의 오늘과 내일]문재인의 망각과 윤병세의 침묵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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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부국장
박성원 부국장
 노무현 정부가 2007년 11월 21일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하기에 앞서 북한에 물어봤다는 ‘송민순 회고록’에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정작 빈틈없는 공조를 다짐해 온 미국에는 기권 방침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외교전문에 따르면 표결이 있은 뒤인 12월 4일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과 만난 우리 외교부 담당자는 “(인권결의안에) ‘기권’하기로 한 최종 결정은 표결 2시간 전에야 이뤄졌다”고 말했다. ‘2시간 전에야 입장이 정해졌다’고 해명했다면 미국 측에는 빨라야 표결 2시간 전에 알려줬거나 표결 때까지 아예 알려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008년 4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제부터 한국에 정보를 주겠다”고 말했다(이동관 회고록·도전의 날들).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 일변도 정책으로 금이 갈 대로 갔던 한미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버시바우 대사는 미 국무부에 타전한 외교전문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박선원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이 수년간 추진했으며, 이를 위해 4년 전 박 비서관과 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서훈(전 국가정보원 3차장) 등 3명의 소그룹이 결성됐다”고 보고했다.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방침에 반대한 송민순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자신이 남북 정상회담 추진 사실을 미리 알 경우 회담을 (북한의) 비핵화 속도와 맞추도록 미국과 조율하자고 주장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동맹파가 남북 관계를 중시하는 이른바 자주파에 왕따를 당한 것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시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방침을 북한에 사전 문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데는 이처럼 북한뿐만 아니라 한미 동맹의 문제까지 얽혀 있는 사안의 미묘함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인권은 헌법상 우리 국민의 문제이자 인류 보편의 가치에 관한 국제 문제다. 내년 대선을 색깔론 공방으로 저물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문 전 대표는 망각에 묻혀버린 2007년 당시의 전말을 분명하게 밝히고 향후 북한 인권과 북핵 문제, 그리고 한미 동맹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국민이 궁금히 여기는 의문점은 비켜 가면서 “새누리당이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종북 공세를) 끝까지 계속해도 좋다”고 언성을 높이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방송인 김제동은 ‘영창 발언’ 이후 진실 공방에 휩싸이자 “국정감사에 나를 부른다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영창살이의 진위는 밝히지 않았다. 유력 대선 주자가 그런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07년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비서관으로서 11월 15, 16, 18일 청와대 회의에 참석했으면서도 결의안 기권과 대북 문의 논란에 침묵하고 있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태도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정권을 바꿔가며 관직을 오래한다 해서 ‘영혼 없는 관료’가 황희 정승이나 서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김정은만 좋아할 여야 간 이전투구의 조기 종식을 위해서도 윤 장관의 침묵은 끝나야 한다.

 송 전 장관은 어제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는 물론 회담 후에도 안보 관련 일련의 후속 조치에 대한 회의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고 밝혔다. 문 전 대표가 기억을 되살리고 윤 장관이 침묵에서 깨어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박성원 부국장 swpark@donga.com
#문재인#윤병세#노무현#한미 관계#송민순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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