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광표]역전의 명수 군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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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정책사회부장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쉼 없이 흘러온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곳, 전북 군산. 요즘 군산을 찾는 사람이 많다. 군산에 이런저런 볼 것이 많지만 최근 들어 대세는 단연 근대문화유산이다. 군산을 찾는 외지인들은 대부분 군산 도심에 산재한 근대유산을 둘러본다. 일제강점기 경제수탈과 문화침략의 상흔을 보여주는 옛 군산세관 본관, 옛 일본 18은행 군산지점, 옛 조선미곡회사 쌀 창고,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군산 내항 부교(浮橋), 신흥동 일본인 가옥(히로쓰 가옥).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며칠 전 군산에 다녀왔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본식 건축물로 이뤄진 동국사. 오랜만에 동국사에 들렀더니 일제 약탈문화재 환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새삼 정문 기둥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九年 六月 吉祥日(○○ 9년 6월 길상일)’. 지워진 맨 위 두 글자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니 昭和(소화)였다. ‘1934년 6월은 좋은 날’이라는 뜻이다. 1934년이면 군산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해진 시절이었다. 채만식이 군산을 무대로 소설 ‘탁류(濁流)’를 쓴 것도 1937년이었다. 그 시절을 길상일이라고 새겨놓다니, 군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광복 이후, 누군가 그 치욕과 수난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소화 두 글자를 없애버린 것은 아닐까.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더니 전시실에 재현해놓은 일제강점기 때 거리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조장, 영화관, 신발가게, 미곡상회, 인력거 회사…. 관람객들은 그 앞을 지나가며 열심히 기념촬영을 했고 그 사이사이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패널도 눈에 들어왔다.

군산 곳곳엔 일제 식민지 시절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군산을 걸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색다른 전시를 만났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이었다. 전시 타이틀은 ‘시민야구의 신화, 역전의 명수 군산’.

야구 명문 군산상고 정도로만 군산의 야구를 기억하던 내게, 이 전시는 군산의 야구 역사가 훨씬 깊고 넓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1903년 전후 군산지역에 야구가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초중고교로 이어져 오는 군산 야구. 그 정점은 역시 군산상고가 아닐 수 없다. 197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동아일보 주최) 결승에서 1 대 4의 열세를 딛고 9회 5 대 4로 역전승을 일궈낸 군산상고. 이때부터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불리며 한국 고교야구를 풍미했고, 군산은 야구의 도시로 강렬하게 각인됐다.

이 전시를 통해 군산에서 만난 야구의 역사는 그저 군산상고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산의 역사였고, 군산과 함께하는 우리 근현대사였다. 군산상고의 역전승은 군산 사람들에게 근대사의 상처를 극복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무거웠던 마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주변을 둘러보면 근대의 흔적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근대문화유산 답사 열기도 그런 맥락이다. 이에 힘입어 근대 건축물을 박물관 미술관 등으로 꾸미는 자치단체가 늘고 있다. 이는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흐름이 일종의 유행이 되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근대사의 상흔을 왜곡하거나 없애지 말고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흔을 제대로 보존할 때, 그 상흔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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