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반기문 김칫국’ 간보다 망신당한 친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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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국회에서 첫 시정연설을 한 작년 11월 18일 새누리당 내 이른바 친박 국회의원 30여 명이 모임 하나를 만들었다.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다. 박 대통령이 야심 차게 집권 2년 차 국정운영의 방향을 밝히는 날이니 시기도 절묘하다. 주군을 돕기 위해 선제적으로 발 벗고 나선 듯하다. 유기준 의원(당시 최고위원)이 총괄간사를 맡았다.

모임의 취지도 그럴듯했다. 정치, 경제, 외교·통일, 정보기술(IT), 문화·사회·교육, 기타, 6개 분야로 나눠 매달 한 차례씩 세미나를 열어 국정과제를 연구하고 결과를 발표해 국정에 반영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석좌교수)이 ‘국가경쟁력과 국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첫 세미나를 열었으니 이 또한 창립 취지에 딱 맞아떨어졌다. 특정 계파의 모임이지만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이 모임이 그제 ‘사고’를 쳤다. ‘2017년 대권지형 전망’이란 주제로 9차 세미나를 열었는데, 하필이면 주제 발표를 맡은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강연을 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반 총장의 인기가 특히 높고 그가 대선에 출마한다면 새누리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솔깃한 반응을 보인 참석자들도 더러 있었다. 날짜도 하필이면 박 대통령이 두 번째 시정연설을 한 그날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지만 애인을 앞에 두고 몰래 다른 사람한테 곁눈질을 한 모양새가 돼버렸다. 게다가 들키기까지 했다.

날짜가 겹치고 반기문 총장 얘기가 나와서가 아니라 세미나의 주제를 차기 대권지형 전망으로 잡은 것부터가 잘못이다. 이 주제가 모임의 이름이나 성격인 국가경쟁력 강화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올해 2월에 있은 4차 세미나의 주제는 ‘6·4지방선거 및 새누리당 전당대회 전망’이었다. 이 주제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친박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모임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친박이 정권을 창출한 핵심 집단이라면 자부심에 걸맞은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 처신을 반듯하게 해야 함은 물론이고 정권의 선장이 못 보고, 못 듣는 것을 대신 전해 배가 목표로 정한 항구에 차질 없이 닿도록 조력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한때 스스로를 폐족(廢族)이라 자탄하고, 지금은 당권을 탐하는 패거리 정치로 국민의 눈총을 받는 친노(친노무현)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더 이상 정파의 울타리에 갇혀 있어서도 안 된다. 친박이나 비박이나 새누리당 사람이면 어차피 공동 운명체다.

그런데도 친박이 김무성 대표 같은 당내 비박 대권주자들을 견제하는 듯한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세미나를 가졌다. 더구나 아직 집권의 절반도 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차기’에 곁눈질을 하면서 인기 좋은 업둥이를 데려올 생각이나 하는 것은 박 대통령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권력이나 탐하는 정상 모리배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제 문화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이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제 도입에 찬성하고, 7명이 국회해산제 도입에 찬성할 정도로 정치에 대한 국민 불신이 심각하다. 시들어가는 경제를 살리고 적폐를 도려내 국가를 혁신해야 할 과제들도 벅차다. 공멸을 면하려면 정파와 정당을 가릴 것 없이 차기가 아니라 이 나라가 처한 현실을 직시할 때다. 친박부터 그래야 한다. 그리고 제발 누구라도 국제무대에서 일 잘하고 있는 반 총장을 국내 정치의 소재로 삼아 흔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박근혜 대통령#대권지형 전망#친노#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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