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동네북 향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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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논설위원
최영훈 논설위원
2004년 법복을 벗은 조무제 전 대법관은 청빈 판사로 통했다. 1993년 사법부 재산 공개 때 6400만 원을 신고해 재산 순위가 고위법관 103명 중 꼴찌였다. 34년간 몸담았던 법원을 떠난 뒤 모교인 부산의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갔다. 대법관 출신이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강단에 선 것은 그가 최초였다. 월급을 쪼개 꾸준히 모교 후배를 도우며 검소하게 살고 있다.

그는 지금 부산고등법원 민사조정센터에서 상임 조정위원으로 일한다. 지난해 그는 하는 일에 비해 수당이 지나치게 많다며 자진해서 수당 삭감을 요청해 화제가 됐다. 부산고법 관계자들은 “후배 판사들이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은 “결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분”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두 사람은 30년 가깝게 영남 지역에서만 판사생활을 했다.

향판(鄕判·지역법관) 중에는 두 사람처럼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사람도 많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5억 일당 황제 노역’ 파문이 거세다고 해도 바르게 살아온 대다수 향판까지 동네북처럼 두들기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러나 여론은 향판 제도를 수술해야 한다는 쪽이다. 2011년의 선재성 부장판사 파문, 2013년 서남대 설립자 보석(保釋) 파문으로 누적된 불신이 도화선이 됐다.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킨 항소심 재판은 29년간 향판으로 지낸 장병우 광주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았다. 허 전 회장의 아버지 사위 매제가 법조인이고, 허 전 회장의 동생은 전현직 판사들의 골프모임을 후원했다. 변호사들도 고위법관을 지낸 향판 출신이고, 구형과 함께 벌금형 선고유예를 한 검사도 동향 출신이다. 지역법조계와 기업인 간의 커넥션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향판제는 장점도 많다. 서울 근무를 꿈꾸며 1∼2년 지방에 머무는 ‘뜨내기 법관’에 비해 향판은 지역민의 고충과 애로를 더 잘 이해한다. 전보인사로 인해 재판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완충하는 효과도 있다. 선진국에서도 법관이 특정 지역에서 평생을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부 향판이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엮이면서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의 위기를 불러왔다.

대법원은 선 부장판사 파문을 계기로 2012년 개선안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지역법관 인사 교류 활성화를 통해 지역별 편중을 완화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2004년 공식화한 향판제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향판제를 당장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방치하면 더 큰 문제를 낳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사법 불신’을 우려해야 할 만한 상황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8월 말 기준으로 권역별 향판 비율은 대전 38%, 대구 46%, 부산 31%, 광주 27%였다. 수도권을 제외한 곳에서는 어림잡아 10명 중 3명꼴로 향판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셈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꺼림칙한 기분이라면 어쩔 것인가. 향판 불신은 결국 재판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검찰은 재빨리 허 전 회장을 형집행 정지로 풀어주고 벌금 강제 환수에 나섰다. 검찰은 “5억 원의 노역장 유치 금액은 국민의 법 감정에 비춰 현저히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확정 판결 내용의 일부를 부정당한 법원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사법사상 희대의 코미디라는 지적까지 받는 이번 파문에는 법원 검찰 모두 책임이 있다. ‘황제 노역’ 파문은 어쩌면 예고된 참사라는 생각이 든다. 향판 문제를 수술할 계기를 맞고서도 대법원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적극 검토’만 하다가 변죽만 울릴 것인가.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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