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안철수 ‘디테일의 악마’에 잡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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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안철수 의원이 민주당과의 힘겨루기에서 초장부터 약세를 보였다. 야권 통합신당의 정강정책에 ‘6·15선언과 10·4선언 계승’을 명기할지 말지를 놓고 민주당과 협상을 벌이다 일방적으로 뒤로 물러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거나, 치열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기는 어디로 갔나.

안 의원 측이 내부 논의를 거쳐 자신들의 초안에 두 선언의 계승을 명기하지 않았을 때는 당연히 민주당의 반발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것은 두 선언으로 인한 불필요한 사회적 논쟁을 피하고, 안보와 대북 문제에서 뭔가 다른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취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안 의원의 이념 성향도 반영됐을 것이다. 하지만 협상 과정에서 민주당 측이 거세게 반발하자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언제 우리가 그랬느냐’는 식으로 꼬리를 내렸다. 변화를 거부하는 민주당의 완고함, 변화를 이루기엔 힘과 의지가 부족한 안 의원 측의 나약함이 동시에 연출됐다.

안 의원 측 실무진이 정강정책같이 중요한 사안을 보스와 협의도 하지 않고 민주당 측에 넘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 의원이 자세하게 들여다봤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데도 안 의원은 자신은 몰랐다는 투로 해명했다. 어제 광주 방문에선 “실무선의 착오와 오해”라고 했다. 진짜 몰랐다면 보스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알았으면서도 실무진에 책임을 떠넘긴 것이라면 비겁하다.

안 의원이 ‘새 정치의 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 독자 창당을 접고 민주당과 통합하기로 했다고 밝혔을 때 많은 사람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구심을 나타냈다. 화려한 말잔치의 뒤끝에 벌어진 이번 소동은 그런 의구심이 괜한 트집 잡기가 아님을 보여준 첫 사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역시 틀리지 않는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통합신당의 당헌당규와 나머지 정강정책을 완성하는 데도 넘어야 할 지뢰밭이 수없이 많다. 정당의 정체성은 선언적인 정강정책보다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국민에게 각인되는 법인데, 기초연금을 비롯해 여야가 각축을 벌이는 민감한 법안과 이슈도 수두룩하다. 안 의원 측이 이번 경우처럼 계속 물러선다면 ‘도로 민주당’의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안철수의 새 정치에 많은 국민이 기대를 건 것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보다는 ‘민주당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안철수 등장 이후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별 변화가 없는 반면에 민주당의 지지율은 큰 폭으로 떨어진 것이 그 증거다. 안 의원이 새 정치의 타깃으로 삼아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하지만 민주당의 정치 행태는 통합 선언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다른 중요한 법안들의 처리까지 발목 잡는 ‘인질 정치’도 여전하다. 반대를 위한 반대, 모든 것을 이념으로 재단하고 편 가르는 운동권식 행태, 건국과 산업화를 폄훼하는 배제의 정치, 국가안보와 대북 문제에서의 애매한 태도, 저질 막말 같은 다른 부정적인 행태들도 통합신당이 출범한들 달라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여론을 움직이는 스피커다. 2 대 126의 스피커로는 안 의원 측이 여론전에서 민주당을 당해내기 어렵다. 입법의 주도권도 민주당 의원들이 쥐고 있다. 더구나 안 의원 측은 이미 통합의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간 터라 민주당 측과 갈등이 생긴다고 다시 쉽게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런 난관을 뚫고 안 의원이 과연 통합신당의 새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안 의원의 대권 자질 검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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