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창덕]롯데에 가장 절실한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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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덕 산업부 기자
김창덕 산업부 기자
‘제로 다크 서티’(2012년)는 2011년 5월 1일 미국이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제목이 뜻하는 ‘자정 후 30분간’은 실제 미국 특수부대가 사살작전을 펼친 시간이다. 주인공 ‘마야’는 30대 초반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001년 9·11테러 이후 10년간 오로지 빈라덴만 추적한 인물이다.

마야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조직과 끊임없이 부딪친다. CIA 파키스탄 지부장이 인력 충원 요구를 거절하자 본국에 직무유기 사실을 알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파키스탄에서 빈라덴의 거처로 추정되는 저택을 찾아낸 뒤에는 4개월이 넘도록 매일 책임자를 찾아가 작전 지연을 항의한다. 백미는 CIA 국장이 소집한 회의 장면. 모든 참석자가 빈라덴의 저택이 맞을 확률이 60%다, 80%다 하며 결정을 미룰 때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은 마야는 “100% 확신합니다”라는 말로 방어적 태도의 상관들을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마야는 옳았다. 빈라덴은 저택에 있었고 작전은 성공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몸부림치는 마야에게 조직은 “세상과 혼자 싸우는군”이라며 냉소를 보냈다. 그런데도 마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야의 확신은 결국 작전책임자와 CIA 국장을 움직였고, 그들은 다시 “빈라덴이 있다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버티던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마음을 돌렸다. 만약 마야가 제풀에 꺾여 포기했다면, 또 CIA가 마야를 무시한 채 끝까지 안전한 길만 고집했다면, 미국은 지금까지도 빈라덴을 쫓고 있을지 모른다.

이 영화가 불현듯 떠오른 건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을 지켜보면서였다.

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제왕적 리더십’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롯데그룹 한 전직 임원에 따르면 수년 전 신 총괄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지방으로 가던 한 계열사 임원이 다시 서울로 온 일이 있었다. 신 총괄회장이 “왜 이 회사는 보고를 안 하느냐”고 불호령을 내린 뒤 아무도 “오전에 이미 보고를 드렸습니다”라고 설명하지 못한 탓이었다. 롯데 고위 관계자는 “롯데에선 ‘후계 구도’라는 말 자체가 금기”라고 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두 아들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조차도 아버지는 ‘절대적 권력자’였다고 한다.

롯데그룹 임직원은 국내에만 13만 명이 있다. 총수 일가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고위급 전문경영인도 수십 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은 철저히 침묵했다. 무한 권력을 쥔 창업주는 만 93세가 되도록 현역을 고집하다 경영권 분쟁의 불씨를 남겼다. 롯데가 적절한 시기의 승계와 불투명한 지배구조 개선에 실패한 것은 비단 총수 일가뿐만 아니라 이들을 방관한 경영진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재계 5위 롯데그룹은 창립 67년 만에 가장 큰 위기이자 변혁기를 맞고 있다. 계열사 사장 37명이 모여 신동빈 체제 지지를 선언한 ‘충성 맹세’는 한 번이면 족하다. 롯데가 변하려면 마야의 쓴소리가 더 절실한 시점이다.

김창덕 산업부 기자 drake007@donga.com
#제로 다크 서티#롯데그룹#신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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