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영일]‘스텔스 기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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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일 경제부 기자
손영일 경제부 기자
기자들이 기업을 취재할 때 자주 활용하는 ‘취재원’ 중 하나는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이다. 사업보고서, 감사보고서는 물론이고 주요 주주의 지분 변동 내용, 사외이사의 선임이나 해임 등 주요 사항이 시시각각 공시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유병언 일가가 소유한 청해진해운의 경영 상태를 파악할 때, 고 성완종 회장의 경남기업이 어떤 회사인지 파악할 때도 전자공시시스템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보안에 철저한 대기업들도 공시의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삼성전자의 연간 매출액이 얼마인지, 연구개발비용은 얼마나 썼는지, 임직원에게 지급한 연봉은 얼마인지 등이 공시를 통해 드러난다. 이 시스템이 기업의 투명경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연간 매출액이나 법인세 부담 정도를 알 수 없는 기업들이 있다. 한국 시장에 진출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경영활동이 베일에 싸인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맥도널드, 피자헛 등 글로벌 기업이다. 전자공시시스템의 검색창에 구글을 입력하면 ‘일치하는 회사명이 없다’고 나온다. 아예 등록이 안돼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이렇게 외부감사나 공시의무를 피할 수 있는 것은 한국지사를 유한회사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유한회사는 2인 이상의 사원이 그들의 출자액에 한해 책임을 지는 회사다. 주식회사와 달리 외부감사나 공시의무가 없다. 그나마 약간의 정보가 노출된 애플코리아의 경우 가장 최근의 자료가 2008년 사업연도에 대한 감사보고서다. 2009년 유한회사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지사들은 한국 시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 부분을 배당금이나 로열티 명목으로 본국에 송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얼마인지 알 길이 없다. 글로벌 기업에 대한 한국의 감시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부감사를 받지 않으니 만에 하나 이들이 분식회계를 해도 즉각 파악하기 어렵다. 국세청은 이들의 재무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지만 한정된 인원과 조직으로 글로벌 기업 전체를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기업들이 유한회사의 이런 특성을 악용하고 있는 만큼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2011년 상법 개정으로 유한회사와 주식회사의 차이점은 많이 줄었다.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은 유한회사를 외부감사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부나 국회는 이런 지적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만 보이고 있다. 유한회사에 외부감사 등의 의무를 부과하자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잠자고 있다.

공개된 정보가 전무한 글로벌 기업들의 한국지사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전투기에 빗대 ‘스텔스 기업’으로 불린다. 스텔스 전투기를 잡으려면 더욱 정밀한 레이더가 필요하다.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는 만큼 정부와 국회가 이들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건 책임 방기다.

손영일 경제부 기자 세종=scud2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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