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상운]‘선화공주 - 무왕의 사랑’… 아직 못다한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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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문화부 기자
김상운 문화부 기자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가 역사적 팩트일 가능성을 제기한 동아일보의 3일자 단독 보도에 독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단순히 설로만 주장한 게 아니라 익산 쌍릉에서 출토된 유물 증거를 최초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실은 포털사이트에는 순식간에 15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우리나라 역사에 재밌는 스토리텔링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미처 쓰지 못한 선화공주 이야기를 추가로 풀어본다.

우선 선화공주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라는 의문부터 시작해 보자.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사료와 유물만 놓고 보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 혹은 사택왕후일 것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의자왕의 생년(生年)을 추정해 보면 의외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의 넷째 아들인 융이 서기 682년 68세의 나이로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의자왕이 태어난 해를 역산해 보면 대략 595년 전후로 추산된다.

이때 아버지 무왕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한미한 신분이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로 불렸던 시절이다. 세도가에 의해 일약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까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시대 철종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일부 학자들은 무왕이 당시 자신의 활동무대였던 익산에서 신붓감을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모여 사는 수도 사비성(현 부여) 출신의 여성을 신부로 맞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의자왕의 모친은 사택왕후나 선화공주가 아닌 제3의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익산 쌍릉으로 돌아가 보자. 선화공주가 묻힌 것으로 보이는 쌍릉 소왕묘는 그의 남편 무왕에 의해 조성됐다. 무왕 이전 백제 왕들은 그들의 왕릉을 수도 사비성이 있는 부여 능산리에 세웠다. 그렇다면 왜 굳이 수도에서 떨어진 익산에 왕릉을 지었을까.

실마리는 쌍릉 주변에 함께 조성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는 왕성 터는 물론이고 정원이 꾸며져 있는 기와집과 대규모 수세식 화장실 등 당시로선 첨단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미륵사는 면적이 8만2644m²(약 2만5000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를 두고 학계는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천도(遷都)를 계획한 것으로 본다.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무왕이 쌍릉 소왕묘를 익산에 세운 것도 이곳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 달 뒤면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테마로 한 ‘익산 서동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12년째인 지역축제다. 축제를 본 많은 사람들은 서동요의 러브스토리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 아직도 규명돼야 할 미스터리가 많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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