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슬로 리딩의 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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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 국제부 기자
하정민 국제부 기자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 각기 다른 책 열 권, 스무 권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이제 ‘양(量)’의 독서를 끝내야 한다. 속독 후에 남는 건 단순히 읽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 독서는 무의미하다.”

데뷔작 ‘일식’으로 1999년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39)의 말이다. 한 권의 책을 최대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는 슬로 리딩(slow reading), 즉 지독(遲讀)을 권하는 그의 주장은 바쁜 일상과 넘쳐나는 정보로 책조차 중요한 부분만 읽고 넘어가는 요즘 세태와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는 빨리 읽는 속독이 아니라 느리게 음미하며 읽는 지독이 한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독서법이라며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거쳐 작가가 됐다고 소개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14세 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金閣寺)’를 처음 읽었다. 사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말더듬이 청년이 이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불을 지른다는 내용의 이 책은 어른이 읽어도 난해한 면이 있다. 소년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미시마 유키오의 다른 작품도 읽기 시작했고,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 등장한 괴테 실러 도스토옙스키 등으로 독서의 지평을 넓혔다. 그후 다시 금각사를 읽자 내용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약 10년 후 소년은 일본 문단의 스타가 됐다.

공자의 사례도 있다. 말년에 주역에 빠진 그가 이 책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책을 묶는 가죽 끈, 즉 위편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당시 책은 종이가 아니라 대나무 쪽으로 만들었기에 가죽 끈도 무척 튼튼했다. 이 질긴 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한 권의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고사성어가 ‘위편삼절(韋編三絶)’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이런 취지를 살린 모임, 즉 슬로 리딩 클럽이 화제다. 모임 회원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 모여 한 시간 동안 책을 읽고 헤어진다. 모임을 통한 사교활동도, 책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토론하는 일도 없다. 그저 조용히 책을 읽다 가는 게 전부. 유일한 철칙은 모임 전에 휴대전화 등 정보기술(IT) 기기의 전원을 끄는 것이다. 독서에 완전히 몰입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말로는 늘 여유와 휴식을 찾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선 속도만 추구한다. 출근 버스와 배달 음식이 늦어지면 화를 내고 ‘당일 배송’이 아닌 쇼핑 사이트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속독은커녕 책 자체를 읽지 않는다. 그런데도 슬로 리딩, 슬로 푸드, 슬로 패션, 슬로 트래블 등 수많은 ‘느림’이 화두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속도 추구에 피폐해진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 10권의 목록을 만든 뒤 이를 주변인과 공유하는 ‘북 버킷(book bucket)’이 유행이다. 친구들과 각자 북 버킷에 등장하는 책으로 슬로 리딩을 해보면 어떨까. 먹고살기 바빠도 가을이 가기 전 책 한 권은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독서#슬로 리딩#히라노 게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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