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정은]“탈북자 말만 믿느냐” 핏대… ‘비외교적인’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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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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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정치부 기자
이정은 정치부 기자
12일 오후 조병제 외교통상부 대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아일보가 주태국 한국대사관의 계약직 여직원들이 탈북자들에게 폭언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집중 취재에 들어갔을 때였다. 처음부터 다소 흥분된 목소리였다.

그는 먼저 “우리가 문제의 여직원들로 지목된 사람들을 조사했는데 절대로 그런 적 없다고 한다. 왜 정부 말은 안 믿고 탈북자 말만 토대로 기사를 쓰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과거에도 제기된 적이 있어 외교부가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탈북자에게 욕설을 했다는 주장은 정말 믿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런 기사가 나가면 해외공관 전체가 매도당한다. 직원들 사기는 얼마나 떨어지는지 아느냐”고도 했다.

조 대변인의 말은 속사포처럼 빨라 중간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중저음이던 그의 목소리는 꽤나 긴 ‘성토’가 끝났을 즈음엔 기자의 귀가 얼얼할 만큼 높아져 있었다. 조 대변인은 평소에도 외교관답지 않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지 않아 ‘혈죽(血竹·핏대)’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조 대변인이 이렇게 기자를 향해 핏대를 올릴 만큼 외교부가 ‘사실 무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는 취재 과정에서 해외 공관을 거쳐 입국한 수많은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접했다. 상스러운 욕설을 듣고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탈북자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이런 내용의 보도가 나간 뒤에는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제보가 추가로 들어오고 있다.

외교부도 이런 탈북자들의 주장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해자’로 지목된 여직원들 외에 ‘피해자’인 탈북자들의 얘기도 충분히 들어보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어떤 얘기라도 들어보려고 노력한 흔적은 없다.

주태국 대사관도 마찬가지였다. 대사관 측은 동아일보의 사실 확인 요청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해명에 급급했다. “진상을 조사해보겠다”는 답변은 한마디도 없었다. 대사관 측은 이미 지난해 80대 북한 고위급 간부 출신 탈북자가 보낸 탄원서를 받고도 별다른 시정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물론 정부가 억울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당히 항의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을 향해 거친 항의를 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필요한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 외교부의 비외교적인 대응에 어안이 벙벙했던 이유다. 외교부는 동아일보 보도가 나간 13일 태국에 합동조사단을 급파했다.

이정은 정치부 기자 lightee@donga.com
#기자의 눈#탈북자#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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