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임희윤]“詩想이 떠오른다” 타계 직전까지 노랫말 짓던 ‘작사가 반야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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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문화부
임희윤 문화부
26일 늦은 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은 조용했다.

고인의 영정 앞에 선 기자를 맞은 것은 상주들의 목례만이 아니었다. ‘작사가 반야월’로 더 잘 알려진, 이날 타계한 원로가수 진방남의 노래가 그곳에서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육개장 한 사발과 밑반찬을 들고 나온 셋째 딸 박희라 씨와 한국전통가요사랑뿌리회 관계자들이 고인의 마지막 날들을 회고했다.

95세의 반야월 선생은 100세를 앞둔 가요계 최고령이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은퇴하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뜨기 나흘 전까지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2일 그는 충북 제천시에 내년에 들어설 ‘한국가요사 기념관’에 소장품 무상 기증 협약을 하러 갔다. 협약식이 열릴 제천시청에 다다른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반 선생은 일행에게 “시상(詩想)이 떠오른다. 다들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펜을 꺼낸 그는 노랫말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해도 8곡을 후배 가수들에게 준 반 선생에 대해 지인들은 “별세 직전까지도 소년 같은 감성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최근 내린 봄비 앞에서도 그는 펜을 들어 ‘은실비가 사온사온 내린다’고 적었다. 은실비는 은실을 드리운 듯 내리는 가늘고 흰 비를 가리키는 사전적 용어지만 ‘사온사온’은 반 선생이 비 내리는 모양새를 보고 만들어낸 의태어다. 그는 가사 쓰기에 있어 서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을 끊임없이 찾았다. ‘울고 넘는 박달재’를 여는 ‘물항라’가 그가 만든 단어였고, ‘꽃마차’ 2절의 ‘알곰삼삼’이란 부사는 사전에서 찾아낸 정감어린 우리말(‘알금삼삼’의 북한어)이다.

부지런히 발로 뛴 현장 지상주의도 심금 울리는 노랫말 만들기의 비결이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삼천포 아가씨’ ‘소양강 처녀’ 등 그의 명가사 대부분이 현장에서 나왔다. 말년까지 그는 작품들을 철저히 데이터베이스화했다. 두꺼운 노트 10여 권에 6000여 개의 노랫말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했다. 5000여 곡을 발표했으니 아직 공개되지 않은 노랫말이 1000곡이 넘는 셈이다.

그가 타계 직전까지 출근했던 서울 중구 초동의 한국전통가요사랑뿌리회 사무실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노구를 이끌고 그는 거의 매일 4층 계단을 올랐다. “작가는 가난해야 한다. 돈을 탐해선 안 된다.”

요즘 억대의 저작권료 수입을 거두는 작곡가들 중에는 창작열을 잃어버린, 쉽게 사업가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반야월 선생의 고집스러웠던 ‘현역 정신’이 더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임희윤 문화부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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