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영해]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공약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2002년 9월 30일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은 충청 유세 도중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을 전격 발표했다. 대선이 불과 3개월도 남지 않은 때였다. 호남 민주당에 영남 후보였으니 충청 표만 잡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출입기자들도 전혀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이 공약으로 결국 여야가 극한 대치를 벌이고 국가적인 비효율을 양산했지만 노무현은 본인 표현대로 ‘재미 좀 봤다’. 우여곡절 끝에 세종시 건설 첫 삽을 뜬 것이 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7월이었다.

▷대통령 선거 취재를 해보면 사실 정책은 뒷전이다. 대선 후보의 말실수나 네거티브 공방, 과거 언행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정책은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다. 경제성장률 공약을 한쪽에서 6%로 잡으면 다른 쪽에선 ‘그러면 우리는 7%’라는 식이다. 군대 복무기간을 경쟁적으로 낮추고 복지수당을 마구 올리는 것도 즉흥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노무현의 행정수도 승부수는 수치 싸움이 아니라 기존의 판을 뒤흔드는 것이었기에 먹혀들었다.

▷정상적인 대선이라면 선거 공약은 대통령 당선 후 2개월 남짓 가동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재조정되지만 이번엔 인수위도 없는 조기 대선이다. 급조된 공약으로 내게 어떤 이득이 돌아올지를 따지다간, 자칫 사탕발림 경쟁에 속아 넘어갈지도 모른다. 차라리 토론 과정에서 드러난 말과 행동, 표정을 보고 신뢰가 가는 사람을 뽑는 게 속 편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약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게 한국 대선이다.

▷미국 대선에선 ‘타운홀 미팅’이 정책을 현미경처럼 검증하는 마당이다. 당내 경선 때는 당원들을 모아놓고, 본선에선 무당파 유권자들을 초청해 토론을 벌인다. 대학등록금이나 일자리, 건강보험 같은 생활밀착 공약의 실현 가능성이 집중적으로 걸러진다. 말 잘한다고 좋은 점수를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이번에 뻥튀기 공약을 내건 후보의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타운홀 미팅을 했다면 후보 순위가 바뀌었을까.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노무현#대선 후보#선거 공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