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사회적 특수계급’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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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고려 무신정권 때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던진 말이다. 만적이 상전들을 없애 공경대부(公卿大夫) 자리를 차지하자고 선동할 때 동료 노비들의 마음을 뒤흔든 구호였다. 원래 이 말은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승(陳勝)에게 저작권이 있다. 만적이 꿈꾸었던 신분제 없는 세상은 700년 가까이 지나 갑오개혁 때 와서야 구체화된다.

 ▷헌법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로 시작한다. 1948년 제헌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라고 돼 있다. ‘법 앞에 평등’은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서양 중세 기독교 사상이 출발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만인 평등의 원칙을 실감하지 못한다. 작년에 헌법재판소가 창립 28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8명이 헌법의 평등 조항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5일 새벽 서울 강남 술집에서 만취해 종업원을 때리고 연행될 때 경찰 순찰차를 파손한 김동선 씨가 이틀 만에 구속됐다. 김 씨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셋째 아들로 승마 선수 출신이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마장마술 단체전 금메달 동기인 그와 정유라 씨가 같은 시기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얄궂다. 사법당국이 재력이나 지위 같은 요소에 영향받지 않고 구속을 결정한 것이다. 과거에는 사고 친 부잣집 자제들이 구속되지 않고 풀려나 ‘유전무죄(有錢無罪)’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헌법 제11조 2항이다. ‘특수계급’은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개헌을 할 때 이 조항은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 많은 소수와 돈 없는 다수, 갑(甲)과 을(乙) 그리고 병(丙), 정(丁)으로 계급 아닌 계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대통령도 잘못하면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여론이 자리 잡았다. 언제 마무리될지 모를 이번 사태의 긍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사회적 특수계급#김동선#한화그룹#김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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