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둘레길과 계획 도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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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일단 걷는다는 이들이 꽤 있다. 걷다 보면 자신을 움켜쥐고 있던 일들이 스르르 멀어지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풀리지 않을 듯하던 난제들의 해결책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긴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라고 했다. 걷기가 창의적 영감을 일깨운다는 스탠퍼드대 연구 결과도 있다. 달리기가 사냥감을 잡기 위한 고투이거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라면 걷기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성찰이라 할 만하다.

▷걷기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길이 스페인의 산티아고(Santiago) 순례길이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를 말한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는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향해 9세기부터 순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2세기에는 이곳이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기독교 3대 성지의 하나가 됐다. 요즘 산티아고 순례자들 중에는 한국인이 10위권에 육박할 정도로 부쩍 늘었다고 한다.

▷작가 서영은은 66세이던 2008년 산티아고로 가면서 유언장을 남겼다.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1200km의 카미노(순례길)를 걸을 수 없다는 단호한 결심이었을지 모른다. 실크로드 1만2000km를 혼자 걸었던 프랑스의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출발 전에 자식에게 유서를 보냈다. 고독 속을 걸으며 진정한 자아(自我)와 마주하는 제2의 탄생을 맞으려면 상징적인 죽음의 의식을 거쳐야 하는가 보다.

▷정부는 한반도 남단의 4면을 에워싸는 4500km의 ‘코리아 둘레길’을 2018년까지 만들 계획이다. 2012년 완성된 제주 올레길 이후 전국 각지에서 생겨난 걷기여행길의 종합판이 될 듯하다. 정부는 연간 550만 명의 외국인이 이 길을 찾고 7200억 원의 경제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침묵과 명상 속에서 내면을 향해 걷는 여행자들의 길은 시한을 정해놓고 건설하는 도로와는 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 존재를 찾으려는 이들의 발자국이 쌓여 서서히 만들어진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걷기#산티아고 순례길#코리아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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