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귄터 그라스가 통박한 ‘과거사 문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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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타계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소설 ‘양철북’으로 20세기의 마지막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단골 후보로 거론되다 1999년 72세에 월계관을 썼다. 그의 첫 작품인 ‘양철북’(1959년)은 영화로 만들어져 197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며 지금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세 살 때 스스로 계단에서 굴러 성장을 거부한 주인공 오스카의 기이한 삶은 역사적 죄책감에 시달리는 독일 전후 세대의 음울한 초상이다.

▷그는 한국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영상을 통해 축시를 낭송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안에 서 있었고/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오프사이드….’ 과거 김지하 황석영 등의 반체제 문인들의 석방운동에 참여했다. 재독 학자 송두율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을 때는 탄원서를 보냈다.

▷독일의 어두운 과거에 침묵하지 않았던 그는 오랜 세월 묻어둔 자신의 과거를 2006년 공개했다.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를 통해 10대 시절 나치친위대(SS)에서 활동한 사실을 밝혔다. 지난날 과오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라는 의견과 좌파 평화주의자의 위선이라는 비판이 엇갈렸다. 훗날 그는 “당시가 얼마나 힘든 시대였고 얼마나 무서운 시기였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함부로 평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라스는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시대적 이슈에 적극 참여했다. 자국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신랄하게 고발했듯이 그는 2002년 방한했을 때 일본을 향해 매운 비판을 날렸다. “일본은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인도적, 인간적으로 되돌아보고 밝혀보는 데 무능하다. 일본의 커다란 핸디캡이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 않는다.” 전후 70년, 변치 않는 일본의 ‘과거사 문맹’을 꿰뚫어본 통찰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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