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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동영]소주 7800병 파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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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동영]소주 7800병 파는 나라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입력 2017-03-09 03:00수정 2017-03-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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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한 대학 총학생회가 신입생 환영행사에 쓰겠다며 소주 7800병을 구입했다. 단일 행사에 이렇게 많은 소주를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실 사람이 1700명이란 점을 감안해도 1인당 5병에 가까운 수치다. 술을 마실 다수는 몇 주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신입생이다. 여성이나 종교 신념 또는 체질적으로 안 마시는 사람을 감안한다면 두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실제 술잔 잡는 사람은 소주 8병 이상을 들이켠다는 의미다.

암 전문의들은 한결같이 “이 정도면 치사량”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전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지정한 ‘1군 발암요인’은 음주다. 음주는 간암 유방암 대장암 식도암 구강암 인후두암 직장암을 직접적으로 유발하는 요인이란 뜻이다.

담배의 독성과 다를 바 없다. 담배와 소주를 나란히 놓고 보자. 담배에는 섬뜩한 경고 그림과 문구가 들어가 있다. 담배 자체가 독성물질이니 거기에 ‘순하다’ ‘마일드’ 같은 멋진 문구로 소비자를 유혹하지 못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주에는 청정함을 느끼도록 참이슬, 순하리, 처음처럼 같은 상표가 쓰이고 있다. 건강음료도 아닌데 ‘천연암반수 100%’라는 문구까지 쓴다. 아이유, 수지 같은 인기 연예인이 광고 모델일 뿐 아니라 소주병 라벨과 판촉용 소주잔 아래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톱클래스 연예인이 흥겹게 파티하면서 술 마시는 광고 영상을 보면 누구나 한잔 들이켜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겠나. 돈보다 국민 건강을 생각하는 연예인이라면 최소한 술 광고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

이 나라에선 누가 어디서 얼마나 마시는지 상관없이 얼마든 술을 살 수 있다. 아무런 규제가 없는 탓이다. 음주의 나라로 알고 있는 러시아에서도 오후 9시 이후에는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 한국에선 언제 어디서든 소주에서 양주까지 살 수 있고 길거리든 지하철 안에서든 술병을 기울여도, 운행하는 차 안에서 동승자가 술을 마셔도 이를 막을 근거가 없다. 일정 도수의 주류는 허가받은 전문 업소에서만 판매하게 하고, 공공장소에선 빈 술병만 들고 있어도 처벌하는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렇게 관대하다 보니 술에 취해 남에게 해를 입히는 뉴스는 매일 숱하게 쏟아진다. 술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고 불을 지르고 난동을 부리거나 운전대를 잡고 질주하다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간다. 시간과 장소와 양을 적절히 규제해 과하지 않게 막는 장치가 나오지 않는다면 ‘만취 상태에서 … 저질렀다’는 뉴스는 그치지 않을 게 뻔하다. 지난해 국민 한 사람이 마신 소주는 97병 정도라고 한다. 매주 2병 가까운 양이다.

담배 못지않은 폐해가 분명하게 확인되는데 왜 비슷한 수준의 규제를 내놓지 않느냐고 정부 당국자에게 물었다. 술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상 규제를 신설하기 쉽지 않다는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자, 내 잔 받게”라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남에게 주는 이 말이 친근감과 신뢰를 상징하는 사회이니 그의 푸념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소주를 담배 수준으로 규제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온 국민이 그 부작용을 뉴스로 간접 체험할 뿐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정도라면 사회 분위기를 말하며 강력한 드라이브 거는 일에 주저하는 정부 당국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다. ‘서민의 술’이라든가 ‘영세상인의 주 수입원’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어느 대학의 소주 7800병 뉴스를 듣고 나니 이젠 소주 명칭과 광고, 판매를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신입생 환영회#소주#1군 발암요인#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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