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태훈]청와대 입장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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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훈 정치부 차장
황태훈 정치부 차장
“여기 물길이 흐르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겁니다.”

그때는 의아했다. 삭막한 서울 도심에 인공하천이 생기면 새가 날아들고 사람이 몰릴 거라니.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마장동 신답철교까지 새로 열린 길 5.85km 구간을 걷는 내내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작은 눈매를 번뜩이며 기자에게 “두고 보라”고 했다. 2005년 이맘때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MB) 전 대통령 얘기다.

그렇게 그해 10월 1일 ‘물길’이 열렸다. 1976년부터 고가도로에 덮여 있던 청계천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MB의 예언은 맞았다. 강산이 한 번 바뀐 요즘 청계천은 생태계가 살아났다.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됐다. 점심시간에는 산책 행렬이 줄을 선다. 밤이면 선남선녀의 데이트 장소로 뜨겁다.

되살아난 청계천은 2008년 MB에게 ‘청와대 입장권’을 선물했다. 대통령으로서의 공과를 떠나 대권을 잡은 이들은 MB처럼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청문회 스타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 카리스마를 물려받았다.

반면 내년 12월 대선에선 ‘거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여권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최근 이원집정부제 개헌 방안을 두고도 ‘반기문 대통령+친박(친박근혜) 국무총리’설이 흘러나온다. 현행대로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되 국정은 국회에서 선출된 국무총리가 맡는 분권형 방식이다.

반 총장은 지난달 내한해 “(임기를 마치고) 내년 1월 한국 시민으로 돌아오면 어떤 일을 할지 결심하겠다”고 대권 도전을 암시했다. 이튿날 “확대해석”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북한과의 유일한 대화채널”임을 강조했다. ‘남북 화해’ 카드로 청와대에 입성하겠다는 야심을 내비친 셈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수장이 영남과 호남의 차지였다는 점도 반 총장(충북 음성 출신)에겐 호재다. 이제는 충청에서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다는 분위기여서다.

반 총장은 ‘외치(外治)’ 대통령의 자격을 갖췄다. 1970년 외무고시(3회)에 합격한 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직을 맡았다. YS 정부 시절인 1996년 외교안보수석비서관, DJ 정부 때는 외교통상부 차관(2000년), 노무현 정부에선 외교통상부 장관(2004년)을 지냈다. MB, 박근혜 정부에선 유엔 사무총장을 연임했다. 외교 분야에서 천수를 누린 셈이다.

외교가는 내심 첫 외교관 출신 대통령을 바라고 있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국립외교원의 한 교수는 “외교 통일 분야는 잘해 왔지만 정치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대화로 타협하는 외교 무대와 국정을 조정하는 정치판은 다르다는 얘기였다.

한 야당 의원도 “반 총장이 선거판에 뛰어들면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치권은 ‘사각의 링’이다. 피할 곳 없는 정면승부다. 대권 후보가 되는 순간 과거의 행적, 친인척의 소소한 과오까지 들춰낸다. 당내 경선과 본선까지 인정사정없는 육박전(肉薄戰)을 치러야 한다.

내년에 73세가 되는 반 총장의 대권 드라마는 판이한 두 개의 결론이 예상된다. 노익장(老益壯·나이가 들어도 굳건함)의 승리이거나 노욕(老慾·나이 들며 생기는 욕심)의 좌절이거나. 미국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 맬컴 엑스(1925∼1965)는 권력을 ‘치명적인 유혹’이라고 봤다. “권력은 결코 뒷걸음치지 않는다. 더 큰 권력 앞이 아니라면….”

황태훈 정치부 차장 beetlez@donga.com
#청계천#이명박#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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